월간 좋은수필/좋은수필 본문

[월간 좋은수필 2013년 12월호, 신인상 당선작] 붉은 고개 - 박성실

신아미디어 2014. 9. 15. 17:59

"오랜만에 찾은 공원, 웃자란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시민들의 분주한 일상에 휴식을 안겨 주고 있었다. 광장에 깔린 시멘트블록은 붉은 고개 마을에서 쉼을 얻고, 소박한 정을 나누던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지워 버린 듯했다. 그 틈새마다 비집고 나온 잡초. 사람들의 발걸음에 짓밟히고 짓이겨졌어도 끈질기게 살아 있는 생명. 구멍 뚫린 운동화 앞코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던 아이의 발가락이 떠올랐다. 그동안 그가 겪었을지도 모를 상처와 분노가 그 발가락처럼 삐져나오지는 않았을지…. 깊숙한 어둠 속에서도 굳은 땅을 뚫고 나온 생명력 강한 풀 한 포기에 녀석의 얼굴이 겹쳐졌다."

 

 

 

 

 

 

 

 붉은 고개        박성실

 

   가을 햇살이 좋다며 친구들이 공원을 거닐자고 했다. 전에 살던 동네로 친구들을 만나러 갔던 날, 우리는 며칠 전까지도 유난했던 무더위를 떠올리며 모처럼 여유롭게 산책에 나섰다. 새롭게 조성된 공원이지만 어느새 십여 년이 지나서인지 큰 나무가 제법 눈에 띄었다. 허허벌판이었던 시청 주변을 돌아보며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는데 불쑥 ‘붉은 고개’가 얼굴을 내밀었다.
   뚜벅이 데이트를 즐기던 우리는 주말이면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곤 했다. 이정표도 없이 포도 과수원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 마을을 넘다 보면 너른 들판이 나타났다. 밭둑길을 거닐며 추수가 끝난 들녘의 허허로움도 즐길 수 있어 좋은 코스였다. 언젠가부터 시청이 그곳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고즈넉한 마을에 중장비의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토해내던 신음. 길섶의 나무와 풀잎에 쌓인 흙먼지가 마치 질식할 것처럼 다가오던 날의 느낌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발길은 더 이상 그 마을로 향하지 않게 되었다.
   몇 년에 걸친 시청 건축 공사와 함께 새로운 주거단지가 조성되면서 새 아파트도 많이 세워졌다. 마침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큰애에게 배정될 학교가 집에서 먼 데다 살고 있는 집도 낡고 좁아서 이사하려던 참이었다. 우리 가족도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첫 애가 입학한다는 사실이 초보 학부모의 마음을 무척이나 설레게 했다. 아이는 아침이면 입학 선물로 사 준 책가방을 메고, 작아서 못 신게 되었다며 형이 물려 준 운동화를 신고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두 살 터울의 사촌 형을 유난히 좋아하고 따르던 첫째는 형이 준 것이라면 새것보다도 더 좋아했다.
   운동장엔 경쾌한 동요가 울려 퍼지고 연단에 올라 가르치는 선생님을 따라 앙증맞게 율동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뒷줄에서 저희끼리 폴짝거리며 장난치는 개구쟁이들도 많았다. 그런 아이들을 보는 것도 학부형들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녀석들 틈에서 유난히 발육도 늦어 보이고 옷차림이 추레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무슨 사정일까, 그래도 초등학교 신입생인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녀석의 낡은운동화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녀석의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며칠 후, 선생님께 조심스레 여쭈어보았다.
   “아, 섭이 말씀이군요, 그 애는 붉은 고개에 사는데… . 그 동넨 우리 학군 가운데서도 제일 어려운 데죠. 섭이네 엄마는 가출하고 아빠랑 산다던데 알코올 중독이라나 봐요. 그런 애들을 보면 정말 안타까워요.”
   입학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선생님께선 어느새 가정환경을 꿰뚫고 계셨다. 그 마을에서 입학한 애들이 몇 명 있는데 하나같이 어려운 환경이라고 덧붙였다. 집에 돌아와 도울 방법을 궁리하다가 아들에게 섭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는 금세 저금통을 들고 나와 신발가게에 가자고 했다. 아이가 골라 든 운동화에선 제 또래들이 제일 좋아하는 ‘마징가Z’ 가 빛나고 있었다. 둘째에게 입히려고 모아둔 옷 몇 점과 새 운동화를 챙겨 학교로 갔다. 섭이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선생님께서 잘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계속 관심을 두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따금 아들에게 섭이 소식을 물으면 결석하지 않는다는 대답만으로도 적이 안심됐다. 학년이 바뀌고 우리 애와 다른 반이 되는 바람에 그 녀석은 내 기억에서 차츰 멀어져 갔다.
   붉은 고개. 우리가 종종 지나다니던 마을 언덕길이 바로 ‘붉은 고개’라 했다. 흙빛이 붉은 데서 연유했다지만 왠지 그 이름에서부터 치열한 삶이 연상됐다. 웅장하게 올라간 시청 옆 도심 한가운데 외로운 섬처럼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만 남아 있는 마을. 붉은색 페인트로 이전대책과 보상을 요구하는 구호를 휘갈겨 쓴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끼던 붉은 고개에선 숨죽인 흐느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시한부 인생처럼 갈수록 허물어져 내리며 가라앉던 고개. 시청 주변은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서 세련된 신도시의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지만 그곳은 시간이 흐를수록 퇴락을 더해갔다. 서너 해가 지났을 무렵, 포클레인을 앞세운 소리가 요란한가 싶더니 며칠 새 판잣집 몇십 채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 마을은 십수 년 전 다른 곳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이 모여 뿌리내린 곳이라 했다. 안정이 되어 가던 마을의 뿌리가 개발의 이름으로 흔들린 그들의 고단한 삶은 또다시 낡은 가재도구와 밥솥을 꾸려 안고 길을 떠난 것이었다. 그들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또 다른 삶의 고개를 잘 넘었을까…. 곪아 터진 종기를 싹 도려낸 것처럼 붉은 고개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평지가 되어버린 마을은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 후 그곳에 공원을 조성한다며 어린 묘목을 심고 시멘트블록을 실어 나르는 인부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우리 가족은 다른 곳으로 집을 옮겼다.
   오랜만에 찾은 공원, 웃자란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시민들의 분주한 일상에 휴식을 안겨 주고 있었다. 광장에 깔린 시멘트블록은 붉은 고개 마을에서 쉼을 얻고, 소박한 정을 나누던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지워 버린 듯했다. 그 틈새마다 비집고 나온 잡초. 사람들의 발걸음에 짓밟히고 짓이겨졌어도 끈질기게 살아 있는 생명. 구멍 뚫린 운동화 앞코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던 아이의 발가락이 떠올랐다. 그동안 그가 겪었을지도 모를 상처와 분노가 그 발가락처럼 삐져나오지는 않았을지…. 깊숙한 어둠 속에서도 굳은 땅을 뚫고 나온 생명력 강한 풀 한 포기에 녀석의 얼굴이 겹쳐졌다.

 

 

박성실  -------------------------------------------------

   박성실님은 전 교회연합신보사 편집국 기자. 전 인천 생명의 전화 상담실장.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인천지부 원장, 부이사장 역임. 제9회 중구문예 문학작품 공모전 우수상(수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