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는 필연이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실수하는 일이 더 잦아진다. 그렇다고 나이 듦을 합리화하거나 변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기의 실수를 가급적 빨리 깨닫고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타산지석으로 삼는 태도가 중요함을 또 한 번 깨달았다."
타산지석他山之石 - 이희근
3년 전에 나를 만나는 사람이 나이를 물으면, ‘일흔 살’을 달리 이르는 ‘고희古稀’ ‘희수稀壽’ ‘희년稀年’이라는 말보다는 ‘종심從心’이란 말을 즐겨 썼다. 공자가 70세가 되어 종심소욕從心所欲이나 불유구不踰矩라고 한 데서 유래된 말이지만,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종심소욕從心所欲이라는 말보다는 법도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불유구不踰矩라는 표현이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매사에 조신操身할 줄 알아야 하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니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며 살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내가 ≪월간문학≫ 10월호에 실린 모 작가의 수필을 읽으면서 고소를 금치 못했다. 많은 작가들이 쓴 수필 속에서도 종종 발견했지만, ‘불유구不踰矩’를 ‘불유거不踰矩’로 쓰고 있었다. 그 표현을 읽을 때마다 내가 모 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던, 삼십 년도 훨씬 넘은 옛날에 학생들에게 범했던 실수가 떠올랐다. ‘강 건너 불’이란 표현 대신에 ‘타산지석’이란 말을 써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어느 날 종례시간이었다. 학생들에게 친구 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친구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을 때에는, 모른 체하며 타산지석을 바라보는 식으로 쳐다만 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못하도록 말리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교육하고 있었다.
“선생님, 타산지석이란 말이 그런 뜻이 아닌데요?”
내 말을 들은 한 학생이 갑자기 일어나서 한 말이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일격을 당한 나는 당황하여 다짜고짜 큰 소리로 말했다.
“네까짓 주제에 무얼 안다고 그래? 선생님 말이나 잘 들어.”
욱지르는 내 호통에 학생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실제로 그때 나는 타산지석의 고사성어를 잘 모르고 있었다. 단지 어렸을 때 마을 앞 민둥산에 서 있던 바위가 연상되어 타산지석이란 문자 그대로 남의 산에 있는 쓸모없는 돌로만 알고 있었다.
나는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사전을 펼치고 ‘타산지석’이란 말을 찾아보았다.
“아뿔싸!”
내 입에서 저절로 나온 한숨이었다.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도 자기의 지덕智德을 닦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인데, 나는 남의 산의 쓸모없는 돌로 알고 사용했다. 내 무식이 탄로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제넘게 유식한 체하느라고 잘 알지도 못하는 문자를 쓰다가 큰코다친 신세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다음날 내가 학생들 앞에서 나의 실수를 자인하고 사과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타산지석’이 일생 동안 내 별명이 될 뻔했단다. 대부분 학생들 사이에 자주 애용되는 선생님들의 별명은 특별한 인상착의나 큰 실수에서 유래되었다.
사람들은 ‘巨(클 거)’라는 글자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생긴 오류다. ‘거巨’가 붙은 많은 글자들, 예를 들어, ‘拒(막을 거)’, ‘炬(횃불 거)’, ‘距(떨어질 거)’, ‘鉅(클 거)’ 등은 ‘거’로 읽는다. 따라서 법 ‘구’자인 ‘矩’도 ‘거’로 읽을 거라고 추측하여 생긴 오류다. 어떤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것과 같은 조건 아래에 있는 다른 사실을 미루어 헤아리는 유추에 의한 오류다. 많은 사람들이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다가 범하는 대부분의 실수다.
하지만 남이 실수한 것을 보거나 읽고 비웃을 일도 아니었다. 자신의 행동이나 글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사례는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미는 곤충이 아니기 때문에 거미의 발은 여섯 개가 아니다. 거미는 네 쌍의 발이 몸 좌우에 대칭으로 붙어있어 발이 여덟 개다. 나는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全北隨筆≫ 제76호 속의 <거미손의 대가 담쟁이>라는 제하의 졸고에서 나는 거미가 네 발 달린 것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던 한쪽 구석 벽에서 실오라기 같은 가느다란 긴 네 발을 가진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는 표현은 정말 어이없었다. 기어 다니는 네 발 달린 동물을 연상하여 생긴 오류였음에 틀림없었다.
컴퓨터에 저장된 원고야 정정하면 되지만, 이미 활자화 되어 많은 사람들 손에 들어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면할 길이 없어 앞이 컴컴했지만, ‘네 발 달린 거미’가 나의 별명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자위했다.
실수는 필연이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실수하는 일이 더 잦아진다. 그렇다고 나이 듦을 합리화하거나 변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기의 실수를 가급적 빨리 깨닫고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타산지석으로 삼는 태도가 중요함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이희근 ---------------------------------------------------
≪문학사랑≫ 등단. 수상: 원종린문학상. 수필집: ≪산에 올라가 봐야≫, ≪사랑의 유통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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