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려야 한다. 그리고 갈아타야 한다. 시작이 있었으면 마침이 있는 법. 지금까지의 모든 마침은 연결된 다음 단계가 있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궤도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이 들며 씁쓸해진다. 그동안 애썼다며 쉬어야 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쉰다는 것은 내일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으로 인식되어진 몸이 몹시 어색해 한다."
환승 준비 - 조향순
조급해진다. 그동안 익숙해 있던 가치들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이다.
남편은 이달 말로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입사를 하면서부터 예정된 일이었기에 나름대로 준비도 했다. 그런데 막상 날짜가 다가오니 퇴직을 한다는 것보다 퇴직을 해야 하는 이유가 더 속상하다. 이런 시간이 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또 다른 근사한 삶을 꿈꾸었건만 어느새 남편은 늙다리 아저씨가 되었고, 나는 그의 동반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자꾸 헛헛해진다. 내일을 기약하며 바라보던 지는 해에게 그저 배웅의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작은 화분 앞에 머무는 시간이 잦아졌다.
두 해 전쯤 일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우연히 화원을 둘러보게 되었다. 새끼손톱만 한 잎이 한 개 달린 채 약간 휘어진 20cm쯤 되는 가는 줄기가 심어져 있는 맥주잔 크기의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고려담쟁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그 화분 앞에서 나는 한국 무용의 한 동작을 떠올렸다. 한국 무용을 보면 한 팔을 쭉 편 채 손끝을 다소곳하게 모아 딱히 정해진 곳 없이 멀리를 가리키는 춤사위가 있다. 마치 그 모습 같았다.
커다란 창 앞에 놓인 화분은 작지만 결코 밖의 풍경에 기죽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줄기 끝부터 말라들더니 작은 잎도 말라 버렸다. 하지만 마른 잎도, 줄기도 처음의 자세를 유지하며 화분에 꽂혀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동안 정성을 기울였지만 줄기에 물이 오르지 않았다. 그 후로 늦가을 풍경을 담고 있는 화분을 치우지는 않았지만 물도 주지 않았다.
꽤 오랜 시일이 지났을 즈음 마른 화분에서 실 같은 싹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다. 잡풀이거니 하면서도 마른 흙을 비집고 올라온 그 생명력이 대견하여 얼른 물을 주었다. 며칠 후, 잎이 벌어졌을 땐 너무도 신기하여 잎을 세어보며 감사했다. 세 잎이었다. 들판에서만 자라는 줄 알았던 클로버였다. 아마도 클로버가 아니었다면 뽑아 버렸을 것이다.
세 잎 클로버는 행복 또는 희망이라는 꽃말을, 네 잎 클로버는 희귀성 때문인지 행운이라는 꽃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클로버가 퍼져 있는 곳을 보면 반가워하며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 한다.
고양시로 이사를 와서 주말이면 여기저기 놀러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종마목장을 가게 되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길옆으로 클로버가 많이 퍼져 있었고 잎도 전에 보던 것보다 훨씬 컸다. 습관적으로 클로버 더미를 헤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네 잎 클로버가 눈에 띄었다. 처음으로 직접 찾은 네잎 클로버였다. 모든 행운이 내게 올 것 같은 벅찬 감정은 이루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몇 잎을 더 찾아 행운을 듬뿍 받은 마음으로 수첩에 끼웠다. 그 후론 틈만 나면 그곳으로 갔고 어렵지 않게 네 잎 클로버를 찾아 책갈피에 끼워 놓았다. 얼마 전까지 학교에서 상담교사로 활동을 하며 모아두었던 네 잎 클로버를 아이들에게 요긴하게 썼다. 속상하고 기운이 빠진 아이들의 손에 살포시 얹어주면 의미를 알고 있다는 듯 금방 표정이 밝아지곤 했다.
한 가닥 올라왔던 클로버가 누렇게 변하여 화분 가장자리에 걸쳐졌다. 여러 날이 지나도 그대로 있을 뿐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화분은 다시 말라들었다. 어쩌다 생긴 일이구나 하며 기대를 접으려는 즈음 다른 싹이 올라 왔고 시들어 화분 가장자리에 걸쳐지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 후로는 거르지 않고 물을 주고 있다. 연달아 싹이 올라올 때는 네 잎 클로버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렇게 올라와 누운 잎이 족히 30개가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마른 화분이 아니라 잠재된 생명이 살고 있는 터전이 되었다. 본 줄기에서 잘려진 고려담쟁이의 끝 줄기는 클로버와 일가를 이루게 될 것을 예상했을까?
한동안 은퇴이민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때가 있었다. 남편도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퇴직이 눈앞으로 다가오니 작은 차로 갈아타더라도 가던 방향으로 가기를 원하는 눈치이다. 정년연장이 곧 제도화될 것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편이 퇴직하기 전에 그 제도가 시행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렇게 된다고 해도 언젠가는 이 시간이 어김없이 오겠지만…….
이제 내려야 한다. 그리고 갈아타야 한다. 시작이 있었으면 마침이 있는 법. 지금까지의 모든 마침은 연결된 다음 단계가 있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궤도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이 들며 씁쓸해진다. 그동안 애썼다며 쉬어야 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쉰다는 것은 내일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으로 인식되어진 몸이 몹시 어색해 한다.
화분을 들여다본다. 네 잎 클로버가 불쑥 나와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지금 종마목장으로 달려가고 싶지도 않다. 내 안에 있는 행복을 보듬으며 두루두루 연결된 노선을 살펴보아야겠다.
누렇게 변색된 클로버가 화분 턱에 포개어 눕는다. 쌓인다. 그렇구나. 잃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쌓여가는 시간이구나. 얼른 또 싹이 올라와 주었으면 좋겠다.
환승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서 남편은 어떤 싹을 틔우고 싶은 것일까?
조향순 -------------------------------------------------
동덕여대 졸업, 인천 인화여중 교사, 고양시 청소년 상담복지센터 강사. 원석문학회 회원.
당 선 소 감
네 잎 클로버가 올라왔습니다. 신기하고 감사합니다.
남편의 정년퇴직을 앞두고 지나온 세월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 앞에서 흔들림을 느꼈습니다. 그 마음을 글로 적어 본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글을 끝낼 즈음엔 앞으로 가야 할 길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일상에 감사하고 싶은 여유가 생겼습니다.
수필은 삶에서 우러나오는 글이라고 합니다. 그런 글로 상을 받게 되었으니 이제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늘 부족한 글을 미소 지으며 들어주신 교수님과 선배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제 마음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님께 보답하는 자세로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클로버를, 특히 행운의 클로버를 잘 키우겠습니다.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과비평 2014년 8월호, 제154호 신인상 수상작] 연꽃 속에 - 강경숙 (0) | 2014.07.31 |
---|---|
[수필과비평 2014년 7월호, 제153호 신인상 수상작] 개불알꽃 - 진부자 (0) | 2014.07.09 |
[수필과비평 2014년 7월호, 제153호 신인상 수상작] 달빛 사냥 - 이옥희 (0) | 2014.07.08 |
[수필과비평 2014년 7월호, 제153호 신인상 수상작] 흉터 - 이에스더 (0) | 2014.07.08 |
[수필과비평 2014년 7월호, 제153호 신인상 수상작] 마침표 - 강연조 (0) | 2014.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