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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10월호, 신작수필16인선] 내 안의 목소리 - 박영자

신아미디어 2014. 3. 18. 13:28

"‘그냥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 만 명의 군사를 이기는 것보다 나 자신을 이기는 일이 더 힘들다고 하지 않던가. 언제까지 그를 이겨낼지는 모르지만, 오늘 새벽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나 자신을 지켰다는 자부심에 심호흡을 크게 한다."

 

 

 

 

 

 

 

 내 안의 목소리       박영자

 

   새벽 다섯 시, 꿈속인 듯 괘종시계가 시끄럽게 운다. 무의식 속에서 이불을 걷고 보채는 알람을 달래듯 누른다. 조금만 더 자라는 내 안의 누군가가 나를 귓속말로 속삭인다. ‘남들 다 자는 새벽, 그만하면 걸어 다닐 수 있지 않니? 조금 더 잔다고 나무랄 사람 없으니 더 자거라.’ 꿀보다 단 유혹이다.
   내 안에서 따라다니며 간섭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생활이 나아지면서 찾아왔다. 그가 없을 때 나의 생활은 단조로웠고 단순했다. 형체도 없는 그와 동행하며 그의 눈치를 보고 타협하는 내가 때로는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싫지는 않다.
   오늘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소신대로 하리라 다짐하고 백화점엘 갔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 들었다 놓았다 하였다. 귓속말로 그가 나를 부추긴다. ‘죽으면 돈 가져가니?’ 듣지 않겠다던 마음은 순식간에 달아나고 그의 말에 순종하고 계산대에 물건을 올리는 순간 후회가 따른다. 필요 없는 물건을 샀다는 후회보다 그의 말에 넘어갔다는 것에 마음이 불편하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 시큰거리던 무릎이 탈이 날 때도 그는 내 곁에서 ‘나이가 들면 누구나 오는 증세이니 괜찮아.’ 그런 문제로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어서 여행을 떠나라며 나를 부추겼다. 그의 말대로 홍안의 소녀처럼 떠났다가 통증을 견디지 못해 도중에 취소하고 귀국하자마자 병원에서 피고름을 뺐다. 관절에 무리를 주지 말고 조금씩 운동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받았지만,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데 무슨 운동을 하란 말인가. 그가 부추기지 않았다면 나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의사는 약을 먹는 동안 휠체어를 타라고 한다. 노력도 해보지 않고 덥석 휠체어를 탄다는 것이 마음 편치 않았다. 그가 또 나서며 말한다. ‘하루라도 편하게 지내면 될 일을 왜 까칠하게 거절하느냐.’는 것이다.
   운동이 좋다는 말은 들어왔지만, 그것은 움직일 수 있을 때 이야기다. 이 상황에서 운동한다는 것은 가당찮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집 안에서만 약에 의존해보자며 지내왔다. 하지만, 체질적으로 아스피린 한 알도 먹을 수 없는데 한 움큼씩 먹어야 하는 약을 어떻게 계속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그 문제에 대해 워낙 고통스러워하니까 그는 약을 먹으라는 말도, 먹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더니 시간이 지나자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남들도 다 먹는 약을 너만 꾀병처럼 구느냐.’고 했다. 그의 말을 따르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난들 왜 두렵지 않았겠는가. 약을 먹을 수 없는 내 처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자식인들 못 먹는 어미 속을 어찌 알겠는가. 이제는 저희도 지쳐서 권하지도 않는다. 그도 묵묵부답이었다. 위장이 약한 것도 이유겠으나 약을 먹고 나면 기운이 떨어지고 나른해서 누워 있어야만 한다. 약에 취해 하루하루를 견뎌야 하는 것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늙어 병이 나거든 응급실에서 끼워주는 호수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먼저 성한 사람이 빼 주자던 친구도 찾아오는 횟수가 줄었다. 명치끝에 숨어 있던 그가 또 고개를 들고 내 감정을 부추긴다. ‘남의 암이 내 고뿔만도 못하다는데 너의 고통을 누가 알아주길 바라느냐. 그래서 내가 그렇게 아끼지 말고 쓰라고 이르지 않았느냐.’ 그의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니다. 건강할 때 나를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 후회로 다가왔다.
   아침 햇살이 창가에서 부서지던 날 아침 문득 죽는 날 죽더라도 약을 먹지 않고 수영을 해보자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소리가 들린다. ‘죽기를 각오하고 산다면 무엇이 두려운가.’ 가족 모르게 수영장을 찾았다. 물속에서 한 걸음씩 발을 옮겨 본다. 물의 중력으로 압력을 받지 않아 땅위에서 걸을 때처럼 통증이 오지 않았다. 보폭을 좁게 자금자금 걷는다. 물장구를 치다 힘이 들면 그냥 물 위에 떠 있다.
   걷지도 못하던 몸이 절룩거리며 밖을 나갈 정도가 되었다. 그가 말한다. ‘그래 그거다. 남의 눈치 볼 것 없어. 당당하게 걸어.’ 예전 같았으면 부끄러워 밖에 나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한 걸음씩 떼어 놓는 발걸음이 당당해진다. 수영 선생에게 수영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더니 병부터 고친 다음에 배우라고 했다. 무릎을 고치기 위해 물 위에서 허우적거리던 내가 일 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평형을 잡아간다. 학습의 효과에 스스로도 놀란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돌에 구멍을 뚫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칠흑같이 깜깜한 밤, 좌측 깜빡이를 켜고 신호대기를 기다리면 직진 신호를 받은 차가 바람을 가르며 달려나간다. 조금만 일찍 나왔다면 직진 신호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고, 좌우를 돌아보면 신호를 무시하고 가도 사고의 위험은 없는 듯하다. 그가 급한 어조로 말한다. ‘그냥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 만 명의 군사를 이기는 것보다 나 자신을 이기는 일이 더 힘들다고 하지 않던가. 언제까지 그를 이겨낼지는 모르지만, 오늘 새벽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나 자신을 지켰다는 자부심에 심호흡을 크게 한다.

 

 

박영자  ---------------------------------------

   박영자님은 수필가. 《에세이문학》으로 등단.  이대문학상, 한국문인상 수상.  수필집 《한 장의 흑백사진》, 수필선집 《앞산이 보이지 않는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