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이 있듯이 우리네 인생살이에도 명암이 있게 마련 아닌가. 생각하기도 싫은 우울증. 그 지긋한 어둠 속 병마에서 나를 구해준 아름다운 것들, 자연은 나를 품어주었고 산은 도닥이며 벗처럼 위로해 주었지. 좋은 친구가 있다는 건 축복이요 자랑이 아니던가."
친구야, 고마워 - 오승휴
날씨가 유난히도 무덥다. 낮에는 지글거리는 태양빛에 몸이 새까맣고, 밤에는 그 열기로 잠을 설쳐 마음이 까칠해진다. 제주에도 열대야가 계속된 지 한 달째다. 몸과 마음이 타들어간다. 무더위가 참 야속하다고 느껴지는 올여름이다.
“우리 체험여행 한번 가보세.”
산행을 함께 하는 벗이 여름나들이를 제안하는 게 아닌가.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올해엔 강에서 ‘자연의 소리듣기’ 체험을 하자는 것이다. 모험이 아닌가.
연령에 제한이 있다지만 용기를 냈다. 설렘이 앞섰다. 길을 물으며 찾아온, 해발 700m의 높은 곳에 위치한 평창 도돈리 생태마을. 휘돌아 치는 평창강이 막힘없이 한눈에 들어오고 도로와 밭들도 눈 아래로 성큼 다가선다. 강 건너 저 멀리로 삼방산 줄기가 길게 뻗어 아름다운 계곡. 그리운 어머니 품처럼 펼쳐진 산과 강. 그 위로 하얀 조각구름이 흐르고 있어 풍광 또한 그만이다. 짐을 풀자마자 심신이 가벼워진다.
기다리던 체험시간이다. 고무보트를 타고 계곡의 급류를 헤쳐 나가는 모험스포츠, 스릴이 그만인 래프팅(rafting) 체험은 내 생애에 처음이다. 안전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친구랑 낯선 이들이 함께 양쪽으로 넷씩 여덟이 타자, 전문기사가 뒤쪽에 동승한다. ‘준비’와 ‘시작’ 구령에 맞춰 노를 젓는다. 넘실넘실 흐르는 강물 위로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 어디로 데려갈까. 과속하지 말고 균형을 잡아라. 동작이 모두 하나같아야 하고, 물살에 맞춰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세상사가 그러하듯 수심과 강폭에 따라 물살의 완급이 확연히 달라진다.
“풍덩!” 한참 잘나가다가 급물살에 노 젓는 속도가 안 맞아, 보트가 휘~익 돌면서 나는 강물 속으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의 방심 탓이라고 할까. 건져 올릴 생각은 않고, 와아~ 하면서 모두가 웃는다. 보트 타고 처음엔 걱정스러운 얼굴들이었지만 재미에 이젠 신바람이 났는가 보다. 친구가 던져준 줄을 잡다말고, 달려들듯 헤엄쳐 친구의 손을 붙잡았다. 그들과 함께 웃을 수만은 없었다. 옛 추억 하나가 불현듯 떠올라서다.
내 나이 40대 초반, 병고病苦로 몹시 시달리던 직장시절이었다. 인사발령을 받고 관리부서에 부임하자 우울증이 찾아든 것이다. 막중한 책무와 주변의 기대감이 버거워서였을까. 아니면 소심하고 활달치 못한 내 성격 탓이었을까. 업무는 실타래처럼 뒤엉키기 십상이었다. 자존심을 지키려 사표를 제출해도 반려된 것. 도중하차로 다시 일선으로 이동발령을 받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엉뚱한 일(?)을 벌일지도 모를 만큼 우울증은 점점 심해졌다. 모두 다 귀찮다는 생각뿐, 일에 의욕을 잃어갔다.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며 말수도 줄어들었다. 병마의 잡초가 뿌리를 내려서일까. 육신의 짓눌림은 허리통증까지 불러들였다. 걷기도 버거울 만큼 심각했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우울증과 허리통증. 주변의 화젯거리요, 나로서는 갈림길이었다. 업무시간 중에도 숙직실에 드러눕기 일쑤였다. 어찌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이었다.
“이보게, 산을 함께 오르는 게 어떻겠나?”
소식 듣고 찾아왔다며, 그 친구가 산행을 제안하는 게 아닌가. 우울증엔 특효약이 없다는 것.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데, 귀가 솔깃했다. 주말마다 둘이 같이 산행을 하자는 말에. 친구의 손을 구명줄 붙잡듯 꼭 잡았다.
산행이 시작된 것이다. 친구와 함께 주말이면 산을 오른다. 자연이 어머니의 품이라면, 산은 희망을 주는 등대요 친구라고나 할까. 자연은 기진맥진 힘들어하는 이를 도닥이며 품어 안는다. 봉우리로 솟은 산은 희망을 심어주고 졸졸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갈증을 없애준다. 나무와 풀꽃은 반갑다 손짓하고 새소리 바람소리는 환영의 노래를 연주한다. 자연은 인간 삶의 터전이며, 마음의 고향이다. 직장 하나에만 집착하던 소심한 내게, 마음을 비우고 만사萬事를 관조觀照할 줄 알아야 길이 보인다는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저 멀리 눈 아래로 보이는 도시를 보라. 부와 명예와 권세가 어디쯤에 있는가. 그것들이 눈에 보이는가. 모든 게 네 마음에 달린 게 아니더냐.’
자연의 소리와 빛깔과 냄새가 그리워, 비바람 치고 눈이 와도 아랑곳없이 산행에 나섰다. 중독이다시피 산에 매료되었다. 주말 최우선 일과가 된 산행. 얼마가 지나자 우울증이 무릎을 꿇더니 언제부터인지 허리통증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산이 친구처럼 좋아 그 후에도 7년간이나 주말산행을 계속하였다. 옛 생각에 지금도 가끔 그 산길을 걷는다.
낮과 밤이 있듯이 우리네 인생살이에도 명암이 있게 마련 아닌가. 생각하기도 싫은 우울증. 그 지긋한 어둠 속 병마에서 나를 구해준 아름다운 것들, 자연은 나를 품어주었고 산은 도닥이며 벗처럼 위로해 주었지. 좋은 친구가 있다는 건 축복이요 자랑이 아니던가.
강물 위로 내 몸도 고무보트도 흐른다. 산 중턱에는 평창 성필립보 생태마을의 붉은색 지붕과 하얀 예수님상이 보인다. 아, 래프팅 체험! 얼굴에 미소 띤 벗을 바라보며 붙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준다. 친구야, 고마워!
오승휴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내 마음을 알 거야≫, ≪담장을 넘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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