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는 그 택시 기사의 질문을 다시 나에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이란 동정인가?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연민이 이에 해당하는 것인가? 그게 ‘사랑이란 뭘까’의 답인가? 그렇지만 사랑은 결코 동정이 아니라고 나의 ‘지극히 현대적인 자아自我’는 주장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들 / 강은교
그 여자를 잊을 수 없다.
남항에 정박 중인 배의 불빛들이 마치 긴 머리핀같이 보이던 송도의 바다, 보랏빛으로 걸어오는 저물녘 바다가 그 깊은 눈을 가늘게 흘겨 뜰 때면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이 살포시 켜지던 배들의 불빛, 하루 한 번씩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점등식을 하곤 하던 건너편 영도의 불빛들. 낙타의 등같이 두 개의 육봉이 솟아 있던 앞바다의 섬, 배들을 안고 멀리서 가슴을 내밀고 있던 수평선….
그때 현관 쪽에서 똑똑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저녁에 누굴까?’ 하며 문을 여니, 윗집에 사는 아주머니였다. 손에 무엇인가, 국그릇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릇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다. “자갈치에 갔다가 하도 싱싱해서 가자미 한 마리를 사왔어요. 국 같은 것은 혼자 끓이시기 어려워 잘 잡숫지 못할 것 같아 갖고 왔는데, 한번 맛보세요. 미역에 가자미를 넣고 끓인 것이랍니다. 서울과는 좀 맛이 다를 거예요….” 그 여자는 국그릇 쟁반을 내밀었다. 쟁반 위엔 또 작은 접시가 놓여 있었다. 바다 나물이에요. 미더덕을 조금 넣어봤죠. 향취가 있을 거예요.” 나는 좀 놀랐지만 쟁반을 받아들었다. “이런 것을 다 주시다니…. 잘 먹겠습니다.”
국을 다 가져다주다니, 나는 정말 그날 저녁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삿날 같은 때 떡 돌리는 것쯤이야 많이 경험한 바이지만 국과 나물이라니. 아무튼 나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감동하며 맛있게 먹었다. 그 후에도 그 아주머니는 ‘이런 건 혼자 못 잡수실 것 같아서’하는, 독특한 하이소프라노의 음성과 함께 문을 똑똑 두드리곤 위층으로 얼른 올라가버리곤 했다. 그 후에 조금 형편이 나은 아파트(그러니까 조금 평수가 넓은 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 여자도 잊을 수 없다.
이 여사. 이 여사는 산복도로에서 형편없이 작은 가게를 하는 분이었다. ‘푸른 슈퍼’였던가? 부산에는 유난히 골목이 많고 산복도로가 많다. 아마도 바닷가 언덕에 집들이 빼곡히 차 있기 때문이리라. 가끔 무슨 일 때문엔가 이 여사를 만나면 “시장하시지요?” 하면서 다 늦은 저녁에 밥을 안치기도 하던 이 여사. 특히 그녀가 늘 나를 잡아끌고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하던 작고 어두컴컴한 안방. 그러나 그 어느 곳보다 따뜻하던 아랫목.(그 따뜻한 온기는 추운 날이면 지금도 슬며시 다가오곤 한다.)
그때 나는 집안일 때문에 골치가 아플 때였는데, 그녀는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주기도 하고, 가게 문을 잠가놓고 나와 동행해 주기도 하고, ‘아, 참, 그녀가 나에게 워드 프로세서와 컴퓨터를 처음 챙겨주었었지.’ 하는 생각이 지금 난다. 그랬다. 어느새 나는 그녀가 그때 ‘골치 아픈 일’들을 나서서 해결해주면서 ‘교수님께 이건 꼭 필요하실 것 같아서….’하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녀의 목소리도 독특했었다. 마치 송도 바다에 부는 바람 소리같이 낮으면서도 힘있던 묘한 목소리, 내가 때 없이 전화를 걸어도 싫증 내는 기색 하나 없이 금방 사라져버릴 것만 같이 전화 속에서 울리곤 하던 그 목소리.
그 남자도 잊을 수 없다.
저물녘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거의 파김치가 되어 탄 택시. 나이도 지긋하게 보이던 그 택시 기사.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주 어려운 질문만 아니라면요.”
그는 주뼛주뼛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한 여자를 사귀고 있는데, 그녀는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비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는 생활보호대상자로서 장애자라고 했다. “그래서 저는 쌀, 반찬거리를 사주기도 하고, 옷을 사다 주기도 해요.”라고 그 기사는 쑥스러운 듯 말했다. “그런데 옷을 사들고 가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옷뿐이 아니에요. 무얼 주면 그렇게 행복하답니다. 일찍이 그런 경험은 없었어요. 그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이 나이에 택시를 한답니다. 그래서 결혼하려고 하는데 자식들이 결사 반대한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 택시 기사는 그날 나의 돈을 받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생전 처음 했는데, 하고 보니 마음이 너무나 시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정말 잘 들어주었다는 것이 택시비를 안 받는 이유였다. 아무튼 그날, 나는 정말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는 그 택시 기사의 질문을 다시 나에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이란 동정인가?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연민이 이에 해당하는 것인가? 그게 ‘사랑이란 뭘까’의 답인가? 그렇지만 사랑은 결코 동정이 아니라고 나의 ‘지극히 현대적인 자아自我’는 주장하고 있었다.
‘저물녘을 걷고 있는 이들이여/ 저물녘에는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기다리리라./ 저물녘에 그대는 가장 따뜻한 편지 한 장을 들고/ 저물녘에 그대는 그 편지를 물의 우체국에서 부치리라./ 저물녘에는 그림자도 접고/ 가장 따뜻한 물의 이불을 펴리라./ 모든 밤을 끌고/ 어머니 곁에서.’(졸시, 〈저물녘의 노래〉. 시집 《어느 별에서의 하루》에 수록)
강은교 -------------------------------------------
강은교님은 시인 《사상계》로 등단.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시집 《빈자일기》, 《붉은강》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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