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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0월호, HEALING ESSAY] 마음의 장치 - 조윤수

신아미디어 2014. 1. 17. 08:19

"글을 쓴다는 것도 그런 것이었다. 어떤 장르이든 그 장르에 필요한 장르적인 장치가 숨겨져 있다. 좀 더 일찍 문학을 이해하고 문학적 장치와 문장 수련을 해왔다면 지금 마음의 장치를 쓰듯, 물이 흐르는 듯 잘 짜인 글을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를 텐데……."

 

 

 

 

 

 

 마음의 장치      조윤수


   애타게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봄이 오면 걸을 수 있겠구나!
   목발을 짚고 춘설을 맞은 매화꽃을 가슴 시리게 바라보았던 때가 어젠가 그젠가! 벌써 가지마다 알알이 여물어 가는 열매들이 한가로운 봄날을 즐기고 있다.
   한순간의 실수로 발을 다친 겨울 어느 날, 가뜩이나 장애가 있는 다리인데 낭패스러웠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발목도 잘 돌아가서 일주일만 안정하면 괜찮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일어서려고 하니 발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안간힘을 다하여 3층까지 기어 올라갔다. 다음 날 일단 진찰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갔다가 그날로 반깁스를 하고 왔다. 발목의 복사뼈와 뒤꿈치의 뼈에 금이 갔다는 것이다.
   외부 상처가 없으니 갑갑하면 깁스를 풀고 씻었다. 물론 발을 디디거나 잘못 움직이면 몹시 아팠다. 다음에 진찰을 받으니 통 깁스를 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 10주 정도 걸리겠다고 했는데, 8주까지는 절대 깁스를 풀면 안 된다. 그렇게 풀지 못하도록 장치를 하니까 조심조심 발을 디뎌도 별로 아프지 않았다. 절대 안정 기간은 세월이 약이기에, 아픈 발에 매달려 있을 수 없었다. 조용히 있고 싶었던 생활을 오히려 만끽할 수도 있었다. 잔손질이 필요한 아이들도 없으니. 마음 놓고 아플 수도 있었다.
   깁스는 보호받을 수 있는 방편이었다. 최소한의 활동 외에는 누워서 그동안 못 본 책도 읽었고 그간 어설픈 글공부 한답시고 바빴던 마음도 정리했다. 심한 동작 아닌 요가도 할 수 있었고, 앉아서 명상에 젖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추위면 추위로, 비가 오면 비로 잘도 지냈고, 눈보라가 흩날리면 맞으면 될 일이었다.
   어느 쪽을 잃으면 다른 쪽이 발달하기 마련이어서 언제나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 인체의 신비가 아닌가. 발을 다친 대신 다른 쪽의 활동이 왕성해졌다. ‘차라리 잘 되었어. 아픈 것이 마음까지 파고든 것은 아니니까!’ ‘이건 내가 원했던 일이잖아?’ 스스로 위안했다.
   살아오면서 언제나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마음의 평화에 대한 문제였다. 우리는 곧잘 삶의 고통에 대해 외적 원인을 탓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부터 깨닫게 되었다. 어떤 힘든 일이 생긴다 해도 일단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처하면 된다. 우연과 필연은 손바닥의 앞뒷면 같은지도 모르지만, 모든 행위의 시작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럴 땐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가. 결국, 하느님의 뜻은 깊은 내 속마음의 뜻, 행동의 근원이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사실 아픈 것도 내가 만들고 낫게 하는 일도 내가 하는 일이잖은가. 나의 인因에 연緣이 닿았던 것이리라.
   생각하면 인생의 한 장막마다, 누구나 그러하듯 흐르는 물이 많은 바위를 만나 여울지는 것처럼 여러 고비를 넘기게 된다. 산다는 것은 여름 바다에서 파도타기를 하는 것 같은 아찔한 전율이 있기도 했다. 그러한 세월의 격랑은 생의 씨줄과 날줄이 되어 한 장의 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어디까지 인생의 천이 짜여갈지는 알 수 없다. 우리 인생은 영원히 미완성인 채로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어서 어느 지점에서 갈무리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나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이 내 삶에 어떤 무늬를 만들어갈지 의문스럽지만, 그럼에도 인생의 카펫이 잘 마무리되어 그 위를 누군가가 걸을 수 있으면 얼마나 다행일까.
   철새 탐조대에 올랐다. 깁스를 한 채 목발을 짚고 서서 백조들이 우아한 몸짓으로 긴 목을 빼고 날갯짓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엑스레이에 찍힌 다리 사진은 꼭 두루미 다리같이 미끈하기만 했는데 걸을 수도 없었다. 새들은 그런 가는 다리로 헤엄도 치고 날개가 있어 날아다니기도 하는데……. 살얼음 진 호수 위에서 춤추는 백조가 부러웠다. 백조의 몸짓이 저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물속에서의 끊임없는 물갈퀴 동작 때문이지 않은가. 마음에는 시공간이 없지만, 몸은 이 땅의 것. 삶은 비상을 허락지 않으니 아직 이 세상에 발목이 잡혀 있어야 하나니.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생생한 반증이니, 아픔의 행복이다. 사람은 새처럼 날 수는 없지만, 영혼의 날개가 있으니 마음이 닿는 곳이라면 그 어디로든 비상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에 물갈퀴를 매어두어야 하리라.
   깁스라는 장치는 마음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몸과 마음이 하나로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마음 가는 대로 몸이 가며 몸이 가면 마음도 간다. 꺼내볼 수 없는 그런 마음을 담을 수 있는 몸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마음은 무한대이나 몸은 유한하니 마음의 장치를 잘 활용해야 한다.
   마음을 닦는 사람들에게는 방편이 필요하다. 심우도尋牛圖에서도 날뛰는 소를 길들이기 위하여 고삐를 말뚝에 매어두지 않던가. 마침내 깁스를 푸는 날 의사는 내게 다짐했다. 발목이 굳어질 우려가 있으니 좀 일찍 깁스를 풀자고. 드디어 날뛰려는 마음을 묶어두었던 방편을 풀고 마음의 물갈퀴를 시험해야 할 때가 되었다.
   살아오는 동안 힘든 고비를 넘길 때마다 마음의 장치가 더 튼튼해졌는지도 모른다. 힘든 상황을 만나면 그 일과 내 마음을 분리해야 한다. 힘든 일은 힘들 뿐, 아픈 것은 아플 뿐, 아프다는 상황과 괴롭다는 것은 별개다. 다만, 불편할 뿐. 아픈데 욕심대로 움직이려 할 때 문제가 생긴다. 다가오는 여름, 열정에 맞는 마음의 장치를 써야 하리라.
   글을 쓴다는 것도 그런 것이었다. 어떤 장르이든 그 장르에 필요한 장르적인 장치가 숨겨져 있다. 좀 더 일찍 문학을 이해하고 문학적 장치와 문장 수련을 해왔다면 지금 마음의 장치를 쓰듯, 물이 흐르는 듯 잘 짜인 글을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를 텐데…….

 

 

조윤수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바람의 커튼≫, ≪나도 샤갈처럼 미친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