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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0월호, 사색의 창] 도루묵의 전설 - 조숙

신아미디어 2013. 12. 23. 08:17

"살다 보면 말짱 도루묵 되는 일이 허다하다. 밤새 뒤척이며 세웠던 계획들이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면 언제 그런 다짐을 했었던가 싶게 아침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말짱 도루묵이 된다. 큰맘 먹고 계획한 일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 허탈해지는 날 도루묵찌개 한 냄비 앞에 놓고 툭툭 털고 또 놀라운 계획 하나 세워 볼 일이다."

 

 

 

 

 

 도루묵의 전설      조숙

   어둠이 아직 물러서지 못하고 맴돌고 있는 새벽 어시장에 도루묵이 반짝거린다. 판장 맨바닥에 땡깡 부리듯 누워 ‘난 곧 죽어도 “치”는 아니라고’ 漁漁~ 외치며 시위하는 꼴이 가관이다. 제아무리 떼를 써 봐도 한자로 환목어還木魚니까 도루묵인데 말이다. 예로부터 젯상에 ‘치’자 들어가는 생선은 올라가지 못한다. 멸치 꽁치 삼치 갈치 이런 생선들이 제상에 오르는 걸 본 적 있는지? 철따라 뭍에서만 농작물이 다른 게 아니라 바다농사도 제철이 있다. 봄멸치 여름오징어 가을전어 겨울명태 등 확연히 구분이 된다. 올해는 육지 날씨가 통 종잡기 어려우니 바다 사정도 다르지 않아서인지 아직까지 판장에 도루묵이 설친다. 귀하면 보배라고 몇 년 동안 잘 잡히지 않아서 아주 비싼 생선이었는데 올해는 너무 많이 나서 어민들이 기름 값은 비싸고 도루묵값은 콩나물값 만도 못해서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고 울상이다.

 

   도루묵이 판장에 쫙 깔렸다는 소문을 듣고 죽도시장에 나가 봤다. 스티로폼 박스에 가득가득 담긴 도루묵이 ‘한 상자 만 원’라고 명패를 달고 단정하게 담긴 것도 있고 제멋대로 판장 한복판에 늘어져 한 무더기씩 갈라놓은 것도 있다. 참 신기하게도 크기가 모두 똑같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무리 무리지어 다니는 녀석들이라곤 하지만 개중에 욕심스럽게 먹이를 먹은 놈도 있고 제대로 못 먹은 놈도 있을 텐데 자로 잰 듯 공장에서 찍어낸 듯 크기가 똑같은 걸 보면 그 몰개성이 신기하다. 수놈만 있는지 알배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사실 알배기 도루묵은 실속이 없다. 두둑한 알은 보기에만 넉넉하지 아직 덜 영근 알은 미끈거리고 맛이 없다. 알을 덜어내고 나면 홀쭉한 뱃살에 속살까지 별로 먹을 것이 없어서 숟가락으로 먹기에는 모자라고 젓가락질하기는 살이 흘러내려서 서운하다.

 

   도루묵 알은 정말 예쁘다. 주황색 노란색 보라색 초록색 갈색 등 여러 가지 색깔을 띤다. 산란할 때 붙는 곳에 따라 색깔이 달리 나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알의 보호색인데 도루묵의 알이 녹색 해조류에 붙으면 녹색이고 갈색 해조류에서는 갈색 빛을 낸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앞 문방구에서 도루묵 알을 군것질거리로 팔았었다. 각양각색의 도루묵 알을 삶아서 양은냄비째 길가에 내어놓고 코흘리개들의 주머니를 열게 만드는 것이다. 색깔만 다르지 맛은 같은 것이었는데 나는 왠지 보라색 알이 더 맛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보라색 알만 골라서 먹었다. 와닥와닥 소리나게 씹어서 고소한 국물만 삼키고 나면 입 안에 비닐 같은 알집만 남는다. 어떤 것은 이미 눈이 공알공알 생겨서 모래알처럼 씹히는 느낌이 나는 것도 있다.

 

어릴 때 내 동생은 도루묵 알 때문에 생긴 추억 하나 갖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을 하고 난 다음날이었다. 학교 갈 준비를 모두 마친 동생이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내가 들어갔는데 동생 얼굴이 노랗게 떠서 울고 있는 것이었다. 전날 학교 앞에서 파는 도루묵 알을 사먹으며 알 껍질을 뱉어내야 하는데 그걸 꿀꺽꿀꺽 삼켜버린 것이었다. 동생은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한마당에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사람들은 구경거리가 났다고 모여들었다. 급기야 아버지가 손가락에 참기름을 바르고 파내는 등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서야 겨우 해결되었다. 그날 수돗가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고향에 가면 내 동생을 ‘도루묵 알 먹고 막힌 애’라고 지칭한다.

 

   구룡포에 내가 자주 가는 도루묵집이 있다. 선창에서 멀지 않은 집인데 딱 탁자 세 개만 겨우 비집고 놓아 둔 간이 식당이다. 뽀글뽀글 파마한 아줌마 혼자서 좁은 주방에서 뽁닥뽁닥 요리를 만들어낸다. 주메뉴가 생선찌개인데 제철에 나는 생선을 넣고 즉석에서 끓여주니 어떤 생선을 넣은 것이든 다 맛있다. 나는 저녁에는 가보지 않았는데 느지막이 문을 여는 걸로 미루어 보아 주로 저녁장사에 치중하는 것 같았다. 선창가에 있다 보니 선술 한 잔에 얼큰한 생선찌개 한 냄비 앞에 놓고 뱃사람 특유의 높은 톤으로 왁자지껄 떠들어도 될 만만한 집이다. 나는 이 집을 구룡포의 적산가옥을 찾아온 일본인 친구와 함께 우연히 찾아들어갔는데 너무 맛있어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팁까지 주고 왔다. 그 후 도루묵찌개가 생각날 때마다 먼저 전화를 넣고 한 시간여 달려가곤 한다. 몇 번 그렇게 다녀오고 나서부터는 아줌마와 친해져서 파마가 잘 나왔네 어쩌네 하는 잡담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이 식당 아줌마의 성격도 도루묵 같아서 세상에 급한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어제도 점심시간 전에 가겠다고 전화로 예약을 해두고 갔다. 그런데 내가 도착하고 나서야 “장에 가서 도루묵 큰 거 나왔나 보고 오께요.” 한다. 그제야 시장에 도루묵 사러 간다는 얘기다. 나는 점심시간에 겨우 틈내서 나오느라 마음이 바쁜데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선생님들 싱싱한 거 먹일려고 그러지, 압력솥 돌아가면 가스불 좀 꺼주소.” 하고 나가버렸다. 같이 온 친구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웃는다.

 

   도루묵은 무를 깔고 자박자박 졸여야 제맛이 난다. 시답잖게 생겨먹은 생선이라고 맛도 그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기름이 동동 뜨는 것이 살이 연하고 부드러워서 젓가락보다 수저로 국물과 떠먹어야 한다. 뜨거운 밥 위에 도루묵 하얀 속살을 자분자분 올려먹을 때가 평가절하된 도루묵의 자존심 회복하는 적절한 때이다. 비린 것 싫어하는 사람도 절로 맛있다고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도루묵’이라는 이름에는 확인되지 않은 고사가 있다. 16세기 말엽 조선시대 선조가 임진왜란 중 피란을 갔을 때, 한 백성이 ‘묵’이라는 물고기를 선조에게 바쳤는데 임금이 먹어보니 너무 맛이 좋아 ‘은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임금이 문득 은어가 생각나서 다시 먹어보고는 맛이 예전과 달라 ‘도로 묵이라고 하라.’고 해서 도루묵이 되었다고 한다.

 

   살다 보면 말짱 도루묵 되는 일이 허다하다. 밤새 뒤척이며 세웠던 계획들이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면 언제 그런 다짐을 했었던가 싶게 아침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말짱 도루묵이 된다. 큰맘 먹고 계획한 일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 허탈해지는 날 도루묵찌개 한 냄비 앞에 놓고 툭툭 털고 또 놀라운 계획 하나 세워 볼 일이다.

 

 

조숙  ------------------------------------------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2003), 해양문학최우수(2011),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2011),  수필집: ≪별의 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