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웃지 않고 살았다. 좋게 표현하면 진중했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무거웠다. 게다가 앞에서 말했듯이 천성이 몫을 더했을 수도 있겠다. 그리 살았던 것인데 어느 좋은 날 환한 웃음과 눈물겨운 웃음을 만났다. 꾸밈없이 늙어가는 촌부가 함빡 웃어주었고, 영영 늙지 않을 나이 든 아이가 순한 웃음을 남겨주었다. 더하여 살아오는 동안 마주하고 웃었던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 웃으면서 살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 웃는 얼굴로 살아야지. 꽃도 웃고 나도 웃고 그대도 웃으면 참 좋겠지.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자주 환하게 웃고, 때로 박장대소하며, 때때로는 미소 지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웃으면서 산다."
나도 웃고 그대도 웃으면 - 허창옥
“웃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정말 환하게 웃으시네요.”
몇 해 전인가, 거제 도장포 포구에서 내 또래 아주머니가 땅두릅과 달래를 비닐봉지에 담아줄 때 천 원짜리 몇 장을 건네며 내가 한 말이다. “사람이 오졸이 없어가지고~.” 대답을 하며 또 활짝 웃는데 입가로 주름살이 곱게 잡혔다. 정말이지, 빛이 나도록 환한 웃음이었다.
몇몇 아주머니들이 식당 앞에 나란히 앉아서 강낭콩이며 고구마, 나물들을 팔고 있었다. 그러니 그 웃음에 순박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분명 눈부신 것이었다. 물론 하얀 이 가지런히 드러내는 미인의 미소는 아니었다. 파마머리에 꽃무늬 블라우스와 ‘일바지’를 입고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은,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촌부의 웃음이었다. 그럼에도 그 환한 웃음이 내게로 건너와서 가슴이 벅찼다. 속을 그대로 내어주는 사람 좋은 그 웃음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날 내내 기분이 좋았다. 하여 선배님들 사진을 찍어드리며 나도 모르게 자꾸 웃었던가. 선배 한 분이 “후배님은 웃음이 참 예쁘네.” 하셨다. 웃을 때 예쁘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얼마 전 주말에 M암을 찾았다. 오랜만이었다. 사실 산바람, 꽃바람을 쐬러 목적지 없이 나선 것이었는데 불현듯 그 암자가 생각났다. 멀지 않다, 가보고 싶다, 가자, 그랬던 것이다. 산길을 걷는 동안 산바람이 불고 산새소리 높았다. 암자에 이르니 숨이 찼다. 요사채는 투명한 햇살아래 졸고 있었다. 바람 한줄기가 오래된 느티나무의 막 물들기 시작한 잎사귀들을 흔들었다. 툇마루에 편안하게 앉았다.
그때 젊은 여승과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가 마당을 들어섰다. 얼떨결에 일어서서 주인인 양 인사를 했다. 스님은 예사롭게 우리 부부에게 합장을 하고는 남자와 나란히 툇마루 한쪽 끝에 앉았다.
“자, 신어봐. 맞나 보자.” 남자가 헌 운동화를 벗고 새것을 신었다. “딱 맞네!” 발끝을 꾹꾹 눌러보는 스님은 맑았다. 스님과 남자가 마주 보고 한참을 히히 웃어댔다. 새 운동화를 신고 남자는 이리저리 걸어보였다. 헤벌쭉 웃으며 스님 앞을 왔다 갔다 했다. 그 모습이 정겨워서 다가갔더니 “여섯 살이에요. 거기서 멈췄어요.” 쉰여덟 살이라고 했다. 작은 체구에 주름 자글자글한 얼굴인데 웃을 땐 윗잇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웃음의 눈물겨움이라니!
저잣거리에 있는 치과에서 충치치료를 했다. 기다리는 동안 스님이 자판기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마침 치료를 마친 남자가 그걸 보았다. 금방 치료를 해서 먹으면 안 된다고 스님이 다 마셔버려서 심통이 났다. 온순하여 말을 잘 듣는 편인데 그날은 별나게 떼를 썼다. 스님이 항복하여 새 운동화를 사줬고, 남자는 풀쩍풀쩍 뛰면서 돌아왔다고 했다.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감색 잠바와 검정 바지를 입은 그 개구쟁이의 짧게 깎은 머리에는 흰 머리칼이 제법 섞여 있었다. 그가 어떤 연유로 거기에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쉰여덟의 남자는 여섯 살 아이처럼 웃었다. 짧은 이와 붉은 잇몸, 그 웃음이 내게 남았다. 어쩌면 그렇게 웃었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버림받았을 수도 있었겠다. 그 정황을 짐작할 수 없고, 가슴에 어떤 상처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의 웃음을 말해도 되는 걸까. “당신의 웃음은 순하고 눈물겹습니다.”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내 언제 그리 웃었을까. 체면 때문에, 인생의 구석진 곳을 구석지게만 바라본 내 편향된 시선 때문에, 아니면 천성이 그러해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절집을 나오고, 산을 내려오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거울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는 맑지도 순하지도 예쁘지도 않았다.
잘 웃지 않고 살았다. 좋게 표현하면 진중했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무거웠다. 게다가 앞에서 말했듯이 천성이 몫을 더했을 수도 있겠다. 그리 살았던 것인데 어느 좋은 날 환한 웃음과 눈물겨운 웃음을 만났다. 꾸밈없이 늙어가는 촌부가 함빡 웃어주었고, 영영 늙지 않을 나이 든 아이가 순한 웃음을 남겨주었다. 더하여 살아오는 동안 마주하고 웃었던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 웃으면서 살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 웃는 얼굴로 살아야지. 꽃도 웃고 나도 웃고 그대도 웃으면 참 좋겠지.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자주 환하게 웃고, 때로 박장대소하며, 때때로는 미소 지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웃으면서 산다.
허창옥 -----------------------------------------
월간 ≪에세이≫ 등단. 수필집: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길≫, ≪먼 곳 또는 섬≫, ≪새≫. 산문집: ≪국화꽃 피다≫, ≪그날부터≫. 수필선집: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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