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러하듯이 나도 나에게 주어진 삶을 절이고, 치대고, 버무리면서 먼 길을 왔다. 내가 김치라면 나는 어떤 맛의 김치일지 궁금하다. 미나리김치같이 향긋할까, 열무김치같이 아삭할까, 고들빼기김치같이 쌉쌀할까, 겨울 동치미같이 차분할까, 묵은지의 그윽한 풍미가 나는 숙성된 김치일까? 행여 까칠한 성미로 밥상을 망치는 그런 김치는 아닐까? 이제부터라도 나 스스로를 절이고, 치대고, 버무리는 일에 정성을 다해야겠다. 어떤 밥상, 어떤 식성에도 잘 어울리는 향긋하고 아삭하며, 화끈하고 시원한 김치처럼 신명나게 살고 싶다."
김치처럼 - 박흥일
얼큰한 김치찌개를 먹고 진땀을 흘리면서 ‘어- 시원하다.’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사람은 한국 사람이다. 막걸리의 텁텁한 뒷맛을 김치 조각으로 입가심하고 주먹손으로 턱을 훔치며 빙긋 웃는 사람은 원조 한국인이다. 김장김치를 찢어 올린 뜨거운 밥만 봐도 한 입 가득 군침이 샘솟는 사람은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어도 대한大韓의 핏줄이다. 카메라 렌즈를 보며 입을 모아 ‘ 기임∼치이∼!’ 라고 외치는 사람은 토종 한국 사람이다. 김치는 한국 사람의 행복 유전자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절이고, 치대고, 버무리기가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먹는다. 김치는 절이고, 치대고, 버무리는 솜씨가 절묘하게 조율된 오색오미五色五味의 오케스트라이다. 배추, 무, 오이를 버무린 섞박지도 있고, 절인 무로 꽃모양을 만들고 그 가운데 붉은 당근으로 장식한 매화김치도 있다. 동치미에 삶은 꿩고기를 뜯어 섞은 꿩김치도 있고, 데친 전복과 나막무를 버무려 숙성시킨 해물김치, 생태아가미를 썰어 넣은 서거리 김치 등등 별의별 김치가 즐비하다. ‘미혼의 젊은 남자로 총각김치를 담근다.’는 믿지 못할 농담이 생길 정도로 한국 사람은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김치를 만든다. 한국은 김치천국이다. 김치는 한국 사람의 음식 아이콘이다.
올해 4월 2일 뉴욕타임스에 김치가 떴다. “김치? 미셀 오바마도 팬이다.”라는 광고가 실렸다. 김치가 한식韓食의 세계화 홍보에 나선 것이다. 미셀 오바마가 손수 기른 배추로 담갔다는 백악관의 김치사진을 꼼꼼히 살펴봤다. 숨이 잘 죽은 통배추에 골고루 속을 채우고 양념을 치댄 포기김치가 아니라, 매운맛에 익숙하지 못한 그들의 입맛에 맞춘다고 그랬는지 몰라도 국물이 잘박한 반지김치를 닮아 보였다. 홍고추, 미나리, 쪽파, 부추는 보이지 않았지만, 김치담기 문외한인 내 눈에도 “영락없는 물김치”로 보였다면 한국의 김치는 이미 지구촌의 별미 반열에 올랐다는 증표가 아니겠는가?
김치는 한때 이방인들이 꺼려하는 음식이었다. 한국인의 몸에서 배어나오는 김치 체취 때문에 곤혹스런 따돌림을 받았던 때도 있었단다. 어느 한국 여행객이 느글거리는 뱃속을 달래려고 호텔의 객실에서 김치를 몰래 먹는 바람에 투숙객들이 코를 틀어막고 뛰쳐나오는 난리 굿판이 났다거나, 어느 한국 유학생은 김치냄새 때문에 입학허가 면접시험에 낙방했다는 서운한 소문도 있었고, 어떤 약골 권투시합 도전자는 한국선수가 일부러 김치 국물을 들이켜고 마늘 냄새를 풍기는 바람에 시합에서 졌다는 개운하지 못한 패자의 변명도 나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셀 오바마가 무슨 연유로 백악관 정원에서 배추까지 직접 가꿔가며 김치를 담갔을까? 미셀 오바마가 김치 담그는 요령을 트위트에 올릴 정도로 김치사랑에 빠진 사연은 무엇일까? 한국 여성의 살결이 유난히 고운 것은 끼니마다 먹는 김치의 약리효능 때문이라는 입소문이 퍼져서일까? 세계를 휩쓰는 케이 팝 가수들의 역동적인 리듬과 현란한 춤사위에서 김치의 화끈한 맛을 느꼈기 때문일까?
20년이 훌쩍 지난 오래전이다. 독일의 아헨에서 연구하던 때다. 감기몸살로 헛소리까지 하며 기진맥진한 적이 있었다. 그때, 물 한 모금도 삼키기 어려웠던 그날, 눈앞에 헛것으로 어른거린 김치국밥을 잊을 수 없다. 이역만리에서 끼니마다 김치를 먹는다는 것은 꿈에나 있을 호사스런 식탁인 줄 누가 모르겠냐마는, 외로움의 향수가 감기 몸살을 빙자해서 김치국밥 도깨비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한인교회에서 챙겨준 김치가 동난 줄 뻔히 알면서도 김치를 담아두던 유리병을 꺼냈다. 바싹 마른 배추김치 한 조각이 유리병 바닥에 눌러붙어 있었다. 칼끝으로 김치조각을 긁어 끓는 물에 털어 넣었다. 아까운 마음에 유리병에 배어들었을 김치냄새까지 뜨거운 물로 헹구어 냄비에 보탰다. 고춧가루가 점점이 떠있는 멀건 국물이 우려져 나왔다. 김칫국이 아니라 김치차가 되었다. 아슴푸레하게 김치냄새가 풍겼다.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솔바람에 알몸을 헹구듯이 개운한 생기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김치! 그 이름만 들어도, 그 냄새만 떠올려도 몸이 뜨거워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김치는 한국 사람의 마음을 달래는 구급약이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도 나에게 주어진 삶을 절이고, 치대고, 버무리면서 먼 길을 왔다. 내가 김치라면 나는 어떤 맛의 김치일지 궁금하다. 미나리김치같이 향긋할까, 열무김치같이 아삭할까, 고들빼기김치같이 쌉쌀할까, 겨울 동치미같이 차분할까, 묵은지의 그윽한 풍미가 나는 숙성된 김치일까? 행여 까칠한 성미로 밥상을 망치는 그런 김치는 아닐까? 이제부터라도 나 스스로를 절이고, 치대고, 버무리는 일에 정성을 다해야겠다. 어떤 밥상, 어떤 식성에도 잘 어울리는 향긋하고 아삭하며, 화끈하고 시원한 김치처럼 신명나게 살고 싶다.
박흥일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쇳물에 반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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