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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9년 3월호, 통권209호 I 세상 마주보기] 디지털 도어락이 말하다 - 박석원

신아미디어 2019. 4. 23. 08:39

"마음이 없는 한낱 기계와도 이러할진대 의사소통으로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간의 관계에서 이런 경우는 더 없이 많지 않을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남의 말을 듣는 나의 경청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말을 앞세우고, 안 해도 그만인 말들을 너무 많이 하며 살았지 싶다."


 





   디지털 도어락이 말하다     -    박석원


   얼마 전부터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자물통이 바로 ‘철컥’ 잠기지 않고 ‘스르스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관절이 삐걱거리고 소리가 난다더니 ‘아마 저 자물통도 사용 연수가 오래되어서 바꿔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하고 무심히 흘려보냈다.
   어떤 의사의 말이 나이가 들면 이곳저곳 몸에 이상이 생기고 아픈 것이 당연한 것인데 ‘나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노인 분들이 많다고 하였다. 오래 사용해서 그런 것이니 웬만한 것은 그러려니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단단한 쇠로 만든 물건들도 오래 사용하면 헐거워지고 낡기 마련인데 칠팔십 년 사용한 몸뚱이가 어찌 이팔청춘과 같으랴. 아무리 쇠로 만든 자물통이지만 십 년 넘게 사용했으니 사용할 때마다 신음소리 한 번쯤 내는 것은 당연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식구들의 자물통에 대한 민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비밀번호를 눌러도 잘 열리지 않고 두 번 세 번 누르면 파장에 물건 팔듯 선심이나 쓰는 양 겨우 열린다는 것이다.
   나름의 처방전을 내었다. 프로그램이 꼬여 버벅대는 컴퓨터를 껐다 켜면 다시 제 기능을 할 때가 있다. 이것도 전자제품이라는 한 족속이니 그렇지않을까. 자물통의 등딱지를 열고 건전지를 뺐다가 다시 끼워 놓았다.
   하지만 식구들의 민원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때 홀연히 머리를 스치는 한 생각이 있었다. 어느 날 비밀번호를 누르려 할 때 번호판의 파란 불빛이 한물간 생선 눈알처럼 희멀겋기에 옆으로 비켜서서 밝은 빛 아래에서 눌렀던 기억이다. ‘오호라 이게 배가 고픈가 보구나.’ 생각해 보니 건전지를 교체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없다. 즉시 새 건전지로 바꾸고 밖으로 나가 번호판 뚜껑을 올렸다.
   아! 저 또렷하게 빛나는 파란 눈들. 아라비아 숫자를 이마에 찍고 종횡으로 질서정연하게 빛나는 파란 눈들이 그믐밤 어둔 하늘에 빛나는 별빛마냥 선명하고 고와 보였다. 비밀번호를 눌렀다. 누르는 번호마다 기합이 든 병사의 야간점호 신고처럼 소리가 또렷하다.
   잠길 때마다 ‘스르스르’ 맥 빠진 소리를 낼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나마 명줄이 끊어지지 않고 힘겹게라도 잠그고 열어줄 때 구원의 소리를 알아들었으니 다행이었다. 어느 날 그 명줄마저 놓아버리고 침묵을 하게 되었더라면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뻔했지 않은가. 잠시나마 낡아서 그러려니 하고 여차하면 퇴출시킬 생각을 하였음에 의식이 있는 생물은 아니지만 자물통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이 집안에서 걱정 없이 편히 쉴 수 있게 하였고, 별것 아닌 세간들이지만 우리의 재산을 잘 지켜준 든든한 수문장이 아니었던가.
   마음이 없는 한낱 기계와도 이러할진대 의사소통으로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간의 관계에서 이런 경우는 더 없이 많지 않을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남의 말을 듣는 나의 경청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말을 앞세우고, 안 해도 그만인 말들을 너무 많이 하며 살았지 싶다.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많이 듣고 말은 줄이라는 조물주의 창조의지라는 의미 있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침묵이 금이라는 말도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뜻이 아닐까. 작은 소리도 크게 듣고,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주는 사람이 되리라는 다짐을 해 본다.
   ‘삑 삑 삑 삑….’ 소리가 경쾌하다.
   4학년 손자녀석이 공을 실컷 차고 이제야 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