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10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초막골 - 이용수
"내 소년 시절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초막골! 몰라보게 변해버린 고향의 풍경은 이제 추억 속에서 한 폭의 산수화가 되어 있다. 하얀 뭉게구름이 초저녁 노을을 머금고 초막골 산등선을 비스듬히 타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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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골 / 이용수
시사時祀를 드리기 위해 고향을 찾았다. 행사를 마친 후, 저 멀리 자리한 초막골 산을 바라보았다. 오십여 년 전과는 달리 숲이 우거져 검붉었던 산등성이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 우거진 숲속 어딘가 내가 다니던 길이 있고 청운의 약속을 새겨놓은 바위가 있으리라. 초막골에 기운 마음은 더욱 설레었다.
내 고향은 자란섬紫蘭島과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 있는,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간곡間谷 마을이다. 간곡이란 이름은 산과 산 사이의 동네여서 그리 불려진 듯하다. 간곡 마을은 비스듬히 비탈진 산자락에 열 두 가호家戶의 초가草家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우리 집은 맨 위에 자리했지만 아쉽게도 앞산이 가려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나무하러 갈 때 마을 끝집인 우리집 앞 감나무 밑에 모여 함께 초막골로 갔다.
초막골은 국유지라서 마을 사람들이 마음 놓고 나무를 해 올 수 있다. 수양리洙陽里와 용태리龍台里 3백여 호의 사람들도 여기에 와서 땔나무를 했다. 우리 집도 다른 집처럼 논과 밭이 적은 탓에 나무하는 일이 생계에 큰 부분을 차지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나무하러 다녔다. 아버지는 나에게 맞는 지게를 하나 만들어 주고는 나무를 해 오도록 시켰다. 가난한 집 아들이 살림에 보탤 일은 몸으로 하는 노동뿐이다. 나무하는 것 밖에 달리 도울 일이 없었다. 지게를 지고 아버지와 먼 산길을 걸어 초막골까지 올라가려면 산등성이 재를 넘어 한참 가야 했다. 초막골엔 여름에 산딸기와 머루가 지천으로 열렸다. 아버지가 해온 덩치 큰 나무는 면소재지가 있는 임포장에 가서 팔았고 내가 해온 나무는 집 옆 빈터에 쌓아두고 겨울 땔감으로 썼다. 마음속으로 내 나무도 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내가 태어난 그해는 흉년이 심했다.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한 어머니에게는 젖이 나오지 않았다. 울며 보채는 나에게 어머니는 보리를 갈아 죽을 만들어 먹였다고 했다. 춘궁기春窮期 보릿고개 시절에는 모두가 연명하기가 힘들었다.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을 아침에 만나면 먼저 ‘밥 먹었느냐’고 물었다. 그 당시 밥 먹었느냐는 말은, 일상의 안부가 아니라 간밤의 생존을 묻는 의사소통이었다. 질병과 가난이 일상사였으므로 아침에 만나면 밤새 서로가 무고하였는지 궁금하였던 것이다. 가족 중에 굶어 죽은 이가 없는지 안부를 물을 때 “밥 먹었느냐?” 만큼 절박한 말이 없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말복쯤에는 큰 감나무에서 생감이 많이 떨어진다. 작은 항아리에 물을 조금 붓고 떫은 감을 담가 두었다가 며칠간 삭혀서 먹으면 먹을 만해진다.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와서 우리들 간식거리인 그 감나무를 베어 갔다. 어른들은 제기祭器를 만드는 사람들이 베어 갔다고 했는데 돈을 얼마나 받았는지 어린 우리에게는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맨 먼저 가슴을 후려친 것은 나의 간식거리인 감나무가 사라져 버린 사실이었다. 하지만 부잣집 사람들은 보리밥에 쌀이 섞인 밥을 먹었지만, 가난한 집안에는 고구마가 섞인 보리밥이 아니면 고구마죽이 거의 주식이었다. 그래도 나무하는 일은 여전했다.
어른들과 어울려 나무를 하러 갈 때면 초막골 초입에서 잠시 쉬었다. 저 멀리는 수평선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드넓은 바다에 보이는 작은 섬들은 떠 있는 낙엽 같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부터 가을과 겨울에도 초막골에 가서 나무를 해왔다. 가을 민둥산은 나무가 별로 없어 재를 하나 더 넘어 동산리에 있는 개인 소유의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와야 했다. 도둑질 나무였다. 산주인에게 들키면 나무뿐만 아니라 지게와 낫까지 빼앗겼다. 남의 나무를 훔친 죗값이었지만, 다시는 여기 와서 나무를 하지 않겠다고 애걸복걸 사정하면, 산주는 지게와 낫은 되돌려 주었다. 인정은 메마르지 않은 산골의 인심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의 초막골은 나무를 하다가 손가락을 여러 번 베인 곳이기도 하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나뭇짐을 진 채로 비탈을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어느 가을 날, 친구와 나무를 한 짐씩 하여 언덕에 지게를 기대놓고 쉴 때다. 친구가 낫 끝으로 바위에 이름을 새기고 있었다. 나도 낫 끝으로 힘껏 바위를 쪼아 내 이름 석 자를 새겨 넣었다. 우리는 마주보고 웃으며 “객지에 나가 돈을 많이 벌어 고향에 돌아오면 이곳을 꼭 찾자.”고 다짐하였다. 간곡마을은 지긋지긋한 가난의 장소이지만 초막골은 살림에 보탬을 준 감격스런 장소이면서 젊음의 꿈을 다진 곳이기도 했다. 10여 년 동안이나 지게를 지고 땔나무하러 다녔으니 미운정 고운정이 함께한 곳이며, 바다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초막골 산길이 반세기가 지나면서 숲으로 묻혀 버렸다. 내 이름을 새긴 바위는 분명히 지금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거센 비바람과 눈보라에 맞아 지워졌을지도 모르지만, 바위는 분명 제자리에 있을터이다. 그곳을 찾아서 청운의 꿈을 꾸며 새겨놓은 내 유년기의 낙관이 오롯이 있는지 살펴보고 싶다. 그러나 숲이 우거져 나무하러 다니던 길이 없어졌으니 언제 그곳으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없어진 것이 어찌 그 길 뿐이랴. 간곡마을의 초가지붕도 없어지고 내 지게도 사라졌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생겼고, 집터만 남은 곳도 있다. 사람이 사는 집은 그나마 일곱 가옥뿐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아이들이 없어 폐교가 되었다.
내 소년 시절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초막골! 몰라보게 변해버린 고향의 풍경은 이제 추억 속에서 한 폭의 산수화가 되어 있다. 하얀 뭉게구름이 초저녁 노을을 머금고 초막골 산등선을 비스듬히 타고 넘어간다.
이용수 님은 수필가.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