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10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나무 의자 하나 - 이옥순
"의자에 앉아야 비로소 오래 못 만난 그대 생각이 나는걸. 나만 힘들고, 나만 외로운 게 아니라 그대도 사느라 나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거라는 걸 어디에서 짐작해보겠는가. 혼자 농사짓는 엄마도, 막 결혼해서 살림 재미를 알아가는 아이들도 나처럼 의자에 앉아야 딸인 나를, 엄마인 나를 생각해보겠지. 의자가 없다면 요가 수행도 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어디에 앉아서 기도하겠는가. 마치 댐 수문을 열어 수량을 조절하듯 의자에 앉아 나를 조절한다.”
'
나무 의자 하나 / 이옥순
뜨거운 여름에는 해가 떨어져야 밖에 나와 본다. 어제처럼 마당에 섰는데 뭔가 느낌이 다르다.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 민소매 팔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더위에 속수무책으로 무엇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다. 참새 떼가 날아오르는 서쪽 하늘이 발갛게 물들었다. 옷장에 넣어둔 얇은 카디건이 곧 필요하리라.
의자를 닦을 때가 되었다. 마당 이쪽저쪽에 여러 개 의자를 놓았다. 무심히, 잉여 의자가 많아서 놓은 것 같지만 사실은 이유가 있다. 감나무 아래로 가고 싶을 때가 있고, 모과나무 아래서 서성이고 싶을 때가 있다. 감나무 아래는 오전이 그늘이고 모과나무 아래는 오후에 그늘이 의자로 온다. 오래전에 놓은 의자는 사그랑주머니처럼 낡았고, 올봄에 놓은 의자는 아직 윤기가 남았다. 낡은 의자는 오랜 친구 같고 새 의자는 새로 사귄 이웃 같다. 오래된 의자에는 지나간 이야기가 스며있고 새로 둔 의자에는 이제 새로운 이야기들이 스밀 것이다. 여름내 뜨거운 햇볕 아래서 색이 좀 바랬다. 나뭇진과 새똥 흔적이 무늬처럼 번져있다.
한참을 이쪽저쪽으로 꽁닥거리던 참새가 날아간다. 어제는 청개구리가 앉았던 자리다. 의자에 앉으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고, 의자에 앉으면 생각을 다듬게 되고, 의자에 앉으면 생각을 실천하게 되고, 의자에 앉으면 생각을 버리게도 된다는 것을 의자에 앉아본 나는 안다. 청개구리도 떠나고 참새도 떠났다. 내일이면 개똥지빠귀가 찾아올 것이다.
마음대로 풀이 자란 집 앞 공터 한옆에 벤치가 있다. 그 옆으로 의자 하나가 더 놓였다. 누군가 내다 버린 것을 놓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무가 있고 의자가 있으니 공원이 되었다. 어떤 날은 아이들이, 어떤 날은 어른들이 의자로 모인다. 그들 중 누군가는 가끔 혼자 의자에 앉아 있을 때도 있다. 중년 여인이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을 볼 때는 잔잔한 감동이 번져온다.
순전히 의자에 끌려 카페에 들어가기도 한다. 의자에 관심이 많아 놀림을 받을 때도 있다. 궁둥이가 몇 개냐고도 하고 언제 다 앉아볼 것이냐고도 한다. 의자 수집하느냐는 소리도 듣는다. 그동안 내가 관심 둔 의자는 수없이 많다. 실은 그 중 호숫가 나무 밑 색 바랜 나무 의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 언제가 산책을 멈추고 도시락을 펼쳤던 의자다. 그 의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나만 안다. 볕 좋은 가을날 얇은 책 한 권 들고 그곳으로 가리라 마음먹고 있다. 내 의자 욕심은 그런 것이다.
의자가 없다면 어디에서 허기를 달래겠는가. 의자가 없다면 어디에 앉아서 벅찬 감정을 누르겠는가. 점심과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를 어디에 앉아서 정하겠는가. 해가 쨍한 날 남쪽 바다로 갈 것인지, 비 오는 날 숲으로 갈지를 어디에 앉아서 구체화하겠는가. 의자가 없다면 추억들, 그러니까 해져서 발가락이 나온 운동화를 신고 소풍 갔던 일, 옆집 과수원에 들어가 복숭아를 따 먹은 일을 어디에서 꺼내 보겠는가. 어디에 앉아서 그것들을 윤색해 빛나는 추억으로 돌려놓겠는가. 계절 따라 옷장을, 서랍 속을 정리하듯 의자에 앉아 그것들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정리해 놓는다.
의자에 앉아야 비로소 오래 못 만난 그대 생각이 나는걸. 나만 힘들고, 나만 외로운 게 아니라 그대도 사느라 나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거라는 걸 어디에서 짐작해보겠는가. 혼자 농사짓는 엄마도, 막 결혼해서 살림 재미를 알아가는 아이들도 나처럼 의자에 앉아야 딸인 나를, 엄마인 나를 생각해보겠지. 의자가 없다면 요가 수행도 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어디에 앉아서 기도하겠는가. 마치 댐 수문을 열어 수량을 조절하듯 의자에 앉아 나를 조절한다.
모과나무 아래 놓인 의자는 좀 오래되었다. 집 짓고 남은 나무 자재 몇 개로 만든 의자다. 한쪽 귀퉁이가 삭아 내리고 색도 변했다. 어느 날은 새가 차지하고 어느 날은 내가 앉고 어느 날은 모과를 조르르 올려놓는다. 비바람도 견뎌낸 모과도 익으면 절로 떨어진다. 손만 대어도 툭 떨어져 안겨 온다. 그럴 때면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듯, 삶의 비밀을 알아챈 듯 모과나무 아래 의자에 가만히 앉는다. 금잔화 몇 송이 붉게 핀 위로 아직은 푸른 모과가 햇볕을 받아 빛나고 있다.
이옥순 님은 수필가.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단감과 떫은 감》 《홍차가 우려지는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