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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9년 3월호, 통권209호 I 지상에서 길 찾기] 그래도 아직은 - 오승휴

신아미디어 2019. 4. 4. 10:43

"숲길 걷기는 사색을 즐길 수 있어 좋다. 마음이 맑아진다. 인간은 걷는 존재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내 삶을 불태웠던 용기와 열정의 불씨들을 되살려내야겠다. 나이 들었다 얕잡아 보는 시선에 주눅 들지 않고,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사람이고 싶다. 날마다 걸으니 몸이 좋아한다. 건강이 온전히 회복되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    오승휴


   입춘이 지나고 며칠째다. 이른 봄기운에 날씨는 포근한데도 몸이 차갑고 마음은 무겁다. 아침에 눈을 뜨면 팔다리가 뻐근하고 손발이 저린 느낌이 든다. 사회활동이나 대인관계도 소홀해졌다. 외로움에 마음이 이따금 흔들리며 흐느낀다. 흐르는 세월을 탓하며 스스로를 달래 보지만, 텅 빈 가슴 한구석에 웅크려 앉은 불안과 걱정은 떠나지를 않는다. 우울증이라도 올까봐 조급해진다.
   노년의 행복을 불러오는 첫걸음은 건강이라 했다. 나이 든 지금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있다면 욕심일까. 여생을 웃음꽃 피우며 즐겁게 사는 게 나의 꿈이요, 소망이다. 날이 갈수록 몸 건강과 마음 건강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직은 괜찮은데요. 날마다 걸으면 몸이 좋아합니다.”
   근심 어린 얼굴로 병원을 찾아간 내게 의사는 걷기운동을 권하며 위로했다. ‘인간은 걷는 존재다.’라는 말이 있듯이 나이가 들수록 걸어야 한다는 의사의 처방이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심신의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해진다는 논리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산행을 즐겼던 내가 아니던가. 모든 것을 가졌다 한들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아~차 했다. 그동안 너무 소홀했구나. 순간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은사님의 근엄한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학창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을 때였다. 은사님께서 내게 베풀어 준 관심과 사랑은 특별했다. 그분의 따스한 위로와 쓰디쓴 충고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학업성적은 좋지만 강한 투지력이 모자라. 적극적이어야 해.”
   소심하고 외골수인 학생에게 던져준 한마디의 조언! 곰곰이 생각하니, 나의 성격과 단점을 갈파한 이 충고에는 사랑이 묻어 있었다. ‘집념을 갖고 매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라, 뚝심을 키우라.’는 의미를 함축한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졸업 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그분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직장에서 강제해직되어, 장사를 하며 소송을 벌였던 젊은 시절의 서럽고 고달픈 일들을 어이 다 말하랴. 그대 한없이 울어 보았는가. 눈물을 감추고 힘든 삶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그 패기의 발원지는 은사님의 사랑이었다. 눈물겨웠던 인생길을 헤쳐 나왔던 용기와 지혜와 열정으로, 허기진 마음을 달래고 건강을 지켜내는 게 내게는 급선무다. 저 멀리서 그분의 말씀이 들려온다. 그래도 아직은 늦지 않았다. 지금이 바로 걷기운동을 시작할 때다. 병원에서 집에 오자 곧바로 숲길 걷기에 나섰다.
   가까운 오름 숲길에 들어섰다. 걷는 길에는 사람들이 꽤 많다. 왕복코스라 서로 부딪칠까 봐 ‘우측보행’이란 팻말도 곳곳에 붙여있다. 밝고 화려한 복장을 하고 걸으며 멋을 내는 산책객들, 어린애 손잡고 웃음 지으며 걷는 노인네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마음의 눈을 활짝 열면 세상이 잘 보인다고 그랬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건강 걷기에 열중이다.
   첫날이어서인지 몸이 벅차다. 내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가슴을 쫙 펴고 다리를 쭉쭉 뻗으며 활기차게 걷는 젊은이들이 부럽다. 그전에는 이곳에 와도 무심했는데, 오늘따라 모두가 대단해 보인다. 숲길 왕복 6km 남짓 걷는 데 한 시간 넘게 걸렸다. 건강을 지키려면 강한 투지력이 필수라고 한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마음을 굳게 다졌다. 작심삼일로 끝나면 절대 안 된다고.
   걷기운동은 이제 나의 일과日課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 달쯤 지나가니 걷기가 몸에 제법 익숙해진다. 뻐근한 팔다리도 조금씩 풀리는지 가벼운 느낌이다.
   느긋하게 숲길을 걸어 보라. 바람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숲의 향기에 흠뻑 젖어든다. 출렁이는 너울처럼 연인들끼리 손잡고 멋스럽게 걷는 모습은 일품이요, 그걸 구경하며 걷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오가는 왕복 길,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 간격을 두고 걸으며 정겹게 인사 나누는 산책객들의 미소에도 살짝 빠져든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 흐뭇하다. 외로움에 흐느끼던 내 마음에 평온이 찾아든다.
   사실 외로움을 싫어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한다. 하지만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그만큼 불편과 갈등을 겪기 십상이다. 상대의 입장과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너무 친하고 가까운 탓에 상호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서로를 잘 알기에 이해할 것이라 믿었다가 본의 아니게 큰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러면 분노와 두려움 사이를 방황하며 외로움을 맛보게 된다. 한 번 어긋나면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기란 쉽지 않으니 이것 또한 문제다. 이런 일 저런 생각에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의미를 곱씹으며, 나는 오늘도 향기로운 숲길을 걷고 있다.
   숲길 걷기는 사색을 즐길 수 있어 좋다. 마음이 맑아진다. 인간은 걷는 존재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내 삶을 불태웠던 용기와 열정의 불씨들을 되살려내야겠다. 나이 들었다 얕잡아 보는 시선에 주눅 들지 않고,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사람이고 싶다. 날마다 걸으니 몸이 좋아한다. 건강이 온전히 회복되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