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수필과비평』[2019년 3월호, 통권209호 I 지상에서 길 찾기] 증언 - 서병호
"자유는 애들에게 좀 편하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에서 호흡하지 못한 자유 분위기 속에서 사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을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증언 - 서병호
삼 년 전 태영호가 가족을 데리고 런던에서 망명을 했을 때 우리는 또 북한의 한 외교관이 만세를 불렀구나 생각했다. 태 공사는 다른 탈북자들과 달리 남쪽의 생활에 적응이 빨랐고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에게 공직이 주어져 여기저기 분주히 다녔다. 우연히 ‘통일과 나눔’의 안병훈 이사장을 만났다. 안 이사장은 “우리 재단과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고 다가왔다. 남북한의 현실을 서로에게 정확히 알리는 일을 한다면 통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북한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낼 수 있는 책을 써 보라고 권유했다. 나이 오십대 중반에 불과했고 무슨 거창한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닌데 자서전이든 회고록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망설이는 그에게 안 이사장은 용기를 주었다.
≪태영호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란 책이 나왔다. 친구들과 점심을 하면서 P 공사의 책 소개를 재미있게 들었다. P 공사는 과거에 런던 한국대사관에서 정보를 담당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과 지명이 낯익어 눈에 선하다며 눈시울까지 붉혔다. 당장 구입하여 읽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출판계약은 알 수 없으나 인세수입이 10%가 관행이라고 한다. 만일 100만 부가 나간다면 태 공사는 백만장자가 되어 북한에서는 꿈도 못 꾸는 사태가 벌어질게다. 벌써 약 오십만 부 팔렸다고 한다. “역시 자본주의가 최고야…. 경쟁력만 있다면.” 차를 마시지도 않고 서점으로 달렸다. 혹시나 절품되면 어쩌나 싶었다. 책을 캐시어 카운트 뒤에 쌓아두고 한 권씩 내어 주었다.
내가 이 책에 대해 유별나게 관심을 갖고 약간의 흥분상태인 것은 평소 진솔한 P 공사의 독후감에 감동되었고 또 국제사회로 나오려는 북한의 대외정책을 판단하는 자료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태 공사는 원래 책 출간을 삼월 초로 잡고 계획했다. 그러나 삼월부터 남북관계가 해빙무드로 들어서고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이 책이 정상회담 성사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정상회담 뒤로 미루기로 했다. 5월에 출간되었다. 실은 북미정상회담 전후에 책이 많이 읽혔다고 짐작이 간다. 북한을 다방면으로 알고자 하는 욕구가 남한 사회에 갑자기 생겼다고나 할까.
김정은은 단연 정상들 중에 돋보였고 뉴스를 독차지했다. 어느 나라 정상이 이렇게 각광을 받을 수 있을까? 34세의 젊은 독재자가 비핵화 협상과정에서 ‘평화의 사도’로 변신하고 있다. 악마가 아닌 사람을 악마로 묘사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지만 악마를 천사로 묘사하는 것도 역시 잘못된 표현이다.
한국 언론의 영향력이다. 이 책에서 표출된 북한사회의 특징을 태공사의 눈으로 살펴본다.
북한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은 ‘생활총회’다. 당원 앞에 나가 자기비판을 한다. 자기검열과 상호검열을 통해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형을 만들어낸다. 상호비판을 당성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는다.
또 다른 체제유지 수단은 처형과 숙청이다. 장성택 일당을 처형한 것을 비롯하여 소리 소문 없이 처형되고 지방으로 숙청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1995년 들어서면서 경제사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평양시 배급소에서 쌀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주로 국수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때웠다. 나머지는 다 벤또(도시락)을 싸왔다. ‘벤또’라는 낱말은 일제 잔재지만 북한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있다. 벤또라는 말이 도시락보다 입에서 빨리 나오니까 별 도리 없다. 덴마크 정부는 세계식량계획을 통해 100만 달러 분량의 식량을 북한에 제공하기로 결정하자 런던주재 북한대사와 태영호는 눈물을 흘렸다. 북한에선 큰 재산처럼 여기는 자전거를 덴마크시내에서는 무료로 빌려주고 있었다. 빈익빈 부익부의 상징인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담배 밀수사건, 밀수를 위한 위조 여권 사건 등이 고난의 행군외교 시절에 노출된 현상이었다.
주체사상의 창시자 황장엽 탈북사건을 “남조선 납치”로 주장하다 “비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 우리는 붉은 기를 지키리라.”로 물러선 것도 의미가 있다. 북한 사회의 거물이 탈북하는 현실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햇빛정책, 즉 포용정책을 표방했으며 그동안 김대중 선생을 북한의 편으로 선전해왔다. 각 공관에 내린 지시는 햇빛정책을 비난하라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포용한다는 것이냐 결국 흡수통일정책이 아니냐는 논리로 반대했다.
태 공사는 이 책을 통해 지성인이고 애국자이며 능력있는 외교관임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30년 동안 북한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한 권의 두툼한 기록물을 내놓았다. 한 외교관의 시각으로 본 북한사회의 진면모라고 평가하고 싶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속담이 있다. 한 가지를 이루면 더 큰 욕심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망명에 성공한 태 공사는 아들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영국에서 애들을 공부시킬 기회를 갖게 되니 아버지의 망명 거사가 일거양득의 효과를 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자유는 애들에게 좀 편하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에서 호흡하지 못한 자유 분위기 속에서 사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을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태영호, 그는 과연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