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9월호, 농촌에서 온 수필 I 돼지도 그래 - 박윤경
"미역국보다 더 구수한 추억을 선물한 남편은, 여전히 돼지를 끔찍이 여기며 말끝마다 ‘돼지도 그래’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천생 돼지 아빠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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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도 그래 / 박윤경
며칠 뒤면 생일인 큰아들이 공휴일을 맞아 내려왔다. 미리 생일 밥상을 차려주려 미역국을 끓이다가 불현듯 출산하던 때가 떠올라 혼자 실없이 웃고 만다.
축산과를 전공한 남편이 농장에서 근무할 때 우리는 혼인을 했다. 곧이어 첫아이를 임신하였고, 출산 예정일을 한 달여 남겨놓고 친정집에 들렀다. 하룻밤 머문 후 우리의 보금자리가 있는 안성의 공도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집에까지 도착하려면 네 번의 버스를 갈아타야만 한다.
두 번째 버스를 갈아타자마자, 갑자기 아랫도리가 뜨끈했다. 직감적으로 이슬이라는 걸 알았다. 긴장감이 엄습해왔다. 안성까지 가야만 병원에 도착할 수 있는데 당황스러웠다. 첩첩산중의 험난한 길을 돌고 돌아가는 그 와중에 양수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정류장에서 내려 택시가 있나 둘러보았으나 없다. 정류장 가게에서 아기가 사용하는 일회용 기저귀를 샀다.
세 번째 버스 안에서 남편은 내게 진통이 있는지 묻는다. 아무런 통증이 없다고 하자 안심이 된단다. 돼지도 예정일보다 일찍 양수가 흐르면 진통이 뒤늦게 온다며 나를 안심시키려 애를 쓰고 있었다.
‘감히 자기가 사랑하는 부인을 돼지와 비교하다니’ 상당히 기분이 상했지만, 어쩌겠는가! 행여나 버스 안 손님들이 우리의 대화를 들을까 싶어 시선은 창문 너머에 뒀다. 태연한 척 대꾸는 않았지만, 혹여 버스 안에서 출산하면 어쩌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혼자서 병원을 찾았다. 의사와 수간호사가 기겁을 한다. 양수가 다 빠져나온 상태에서 보호자도 없이 병원을 찾는 산모가 어디 있느냐 한다. 더욱이 산모의 엉덩뼈가 튀어나와 있어 분만하는 도중 아기의 머리를 다칠 수 있다며 다급히 보호자를 찾는다.
택시를 타고 온 남편은 느긋하다. 의사가 남편에게 산모와 아기가 위험할 수 있다며 수술을 권장하자, 남편이 외려 의사를 설득하는 대화가 누워있는 내 귀속으로 쏙쏙 들려온다.
“초산인 돼지도 예정일보다 양수가 빨리 터지면 늦게야 진통이 옵니다. 엉덩뼈는 엑스레이 사진으로 봤을 때 순산에 무리가 없을 테니 유도 분만을 시작해보시지요.” 한다.
드라마에서 산모가 남편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장면이 떠올랐다. 남편이 내 곁으로 오는 그 찰나, 머리카락을 확 움켜잡겠노라고 다짐했다. 서서히 남편이 내게로 걸어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머리숱이 저리도 없었나? 내 남편 맞나? 잠시 잠깐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의아함과 동시에 머리숱이 없는 남편의 모습이 측은지심으로 다가왔다. 그도 잠시, 갑자기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일 년여를 사는 동안, 아니 연애를 하면서도 앞 머리숱이 저리도 없었는지 몰랐다. 내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게 되자 어이가 없었다. 그저 웃음만 나온다. 한번 터진 웃음이 멈추질 않고 눈물이 질금거릴 정도다. 그때였다. 배가 꼬여오면서 진통이 왔다. 아기도 바깥 소식에 덩달아 드잡이를 하며 배꼽을 움켜잡고 웃는 모양이다. 점점 진통은 잦아지고 사지가 찢기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남편은 한결같은 말만 반복한다.
“돼지도 그래, 돼지도 분만하기까지 그래.”
간호사가 심호흡하라고 하면,
“돼지는 자기가 알아서 심호흡해.” 한다.
고통도 아랑곳없이 누군가 남편의 말을 들을까 창피하여, 연신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간호사는 우리 옆에만 오면 얼굴색이 붉다. 양 볼에 알사탕을 물은 듯 억지로 입을 꾹 다문 모습이 역력하다.
난 돼지가 아니었다. 심호흡도 할 수가 없었다. 아기의 길을 순활하게 터줄 양수가 없어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난 그때 천장에 떠다니는 무수한 별을 보았었다.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열 시간의 진통, 두 번의 촉진제를 더 맞은 후 압축기 덕에 3킬로의 아들을 출산했다.
아들이 내 품에 안겼다. 대부분 산모는 아기를 낳으면 제일 먼저 손가락 발가락을 확인한다는데 나는 머리카락부터 만져봤다. 두상은 고난의 흔적으로 쑥 들어갔지만, 다행히 내 아들은 털북숭이였다. 그때 낳은 첫아들의 머리숱은 아직도 굵고 풍성하다.
서른세 번째의 생일이다.
미역국보다 더 구수한 추억을 선물한 남편은, 여전히 돼지를 끔찍이 여기며 말끝마다 ‘돼지도 그래’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천생 돼지 아빠로 살고 있다.
박윤경 님은 《문예한국》 등단. 수필집 《멍석 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