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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9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소원 세 가지 - 민 혜

신아미디어 2019. 3. 25. 08:57

"사노라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던 일들이 시나브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삶의 외줄타기에서 입었던 뭇 상처들도 아물었고, 세상사란 좋든 궂든 시간과 더불어 다 사라져버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 상황에 또 다른 소원을 꼽는다면 뭐라고 적을까. 생각을 더듬자니 가슴 속 소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 나온다. 대별大別하면 당장 급한 것, 당장은 아니지만 남은 인생에서 가장 비중 있게 여겨지는 것으로 나뉘는 것 같다. 예전처럼 세 가지만 추려 볼까한다. 나는 명료한 의식을 위해 우선 심호흡부터 내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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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원 세 가지           /    민 혜

 

   생명체란 뭔가 바람을 안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젖먹이도 나름의 원의는 있을 것이다. 늘 단발로만 지내야 했던 유년 시절, 나는 공주처럼 머리를 길게 길러보는 것과 밤에 잘 때 오줌 싸지 않는 것 그리고 언니 옷을 물려 입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빨강 도트 무늬 원피스를 입어보길 소망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연못과 장미 아치가 있는 집에서 피아노와 첼로를 배우고 싶었지만 이루어지질 않아 차라리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겠다며 소원을 추방해버리기도 했다.
   이러구러 청춘을 태우며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되어 서른을 넘겼다. 그때의 내 소망은 무엇보다 집 마련을 하는 거라 생활비를 절약하며 주택복권도 간간이 샀다. 언제나 빗나갔지만 천만 원이나 걸린 것을 외면하기란 꿈을 접는 것처럼 쓸쓸한 일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내 집 마련의 기회가 왔다. 주택청약부금을 열심히 불입하여 경쟁 치열한 17평보다 당첨 확률이 높은 13평으로 하향 신청한 결과 대망의 아파트 족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나는 130평 저택을 지닌 듯 행복해 했지만 감미는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박살이 났다. 집 팔아 사업하는 사람 치고 잘되는 사람 없더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편은 내 반대를 무릅쓰고 알량한 집을 밑천 삼아 일을 벌이더니 그예 다 말아먹고 빚만 지고 말았다. 나는 동네방네를 이 잡듯 뒤져 가장 후지고도 값이 싼 사글세 연립주택을 구해 새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 주택엔 우리처럼 바닥으로 굴러들어 온, 그러나 한때는 인기작가 반열에 들기도 했던 소설가 Y씨가 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앞 뒷동에 살았고 두 집 남편들은 똑같이 백수였으며 양쪽 집의 거실엔 배도 불릴 수 없는 책들과 클래식 LP판들만 빽빽했다. 그녀의 집엔 문화예술인들과 운동권 학생들이 드나들었고 정치사회적 이슈가 넘실거렸다. 남편은 자기가 백수라는 사실도 다 잊은 듯 그 집에만 가면 흥이 나고 기가 살아났다. 하루는 Y씨가 나를 찾아와 원고지 뭉치를 내밀며 뜬금없는 말을 했다.
   “원빈이 엄마, 혹시 작가를 꿈꾸지 않으세요? 여기다 뭐든지 써봐요. 이거 내가 굉장히 아끼는 원고지예요.”
   아무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나는 꿈꾸고 있었다. 10년 후, 나는 작가가 된다, 된다고, 된다니까, 하면서.
   습기로 벽지가 썩어가고 천정에선 쥐들이 득시글거리고 거실 마루가 삐거덕거리는 집에서 매달 월세를 걱정하면서도 그나마 행복했던 건 예술과 더불어 정신적 유희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 때문이었을 터다. 오페라 <라 보엠>의 한국판이 Y 소설가와 우리 집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Y 씨는 맥주 짝을 외상으로 사들여 놓고 예술을 논하고 군사정권을 성토하며 부어라 마셔라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곤 했다. 그러더니 1년도 못돼 그 동네를 떠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남편은 낙을 잃었고, 나는 10년 후엔 글을 쓸 거라면서 신앙의 세계로 몰입하였다. 믿음이 없었다면 자살 방법이나 연구했을 시절이었다. 그 무렵 한 교우가 소원이 무엇이냐 묻더니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안나 씨, 자기 소원을 써서 성경책 속에 넣어두고 늘 기도하면 그게 이루어진대요.”
   “이루어지든 아니든 기도해서 나쁠 건 없겠지요.”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것으로 자신이 기복신앙인이 아님을 에둘러 표현하였지만 실상은 하루하루 살아내는 일이 한 겨울 삭풍 몰아치는 들판에서 고픈 배를 움켜쥐고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춥고 아슬아슬 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자신도 모르게 백지 한 장을 꺼내어 뭔가를 적어놓곤 성경책 속에 깊이 넣어 두었다.
   며칠 전이다. 서가의 성경책을 모두 꺼내 시편 번역을 비교해보고 있었다. 내가 예전에 보았던 성경책은 누렇게 변색되고 군데군데 그어진 밑줄과 메모로 지저분했다. 책장을 넘기려는데 ‘나의 세 가지 소원’이라고 쓰인 종이 한 장이 보였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 32평 아파트 2) 작가가 되는 것 3) 먹고 살만큼의 수입이 주어지기를


   빙긋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시절엔 이따금 꺼내보기도 한 것 같은데 어느 시점 이후 망각했는가 보다. 당시 내가 바랐던 건 열 가지도 넘었지만 셋만 엄선하였다. 과연 그 소원들은 이루어졌는가? 작가는 벌써 되었고, 아파트도 그럭저럭 되고, 생활비도 안분지족 할 만큼은 채워지는 것 같으니 얼추 이룬 것 같기는 하다.
   사노라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던 일들이 시나브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삶의 외줄타기에서 입었던 뭇 상처들도 아물었고, 세상사란 좋든 궂든 시간과 더불어 다 사라져버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 상황에 또 다른 소원을 꼽는다면 뭐라고 적을까. 생각을 더듬자니 가슴 속 소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 나온다. 대별大別하면 당장 급한 것, 당장은 아니지만 남은 인생에서 가장 비중 있게 여겨지는 것으로 나뉘는 것 같다. 예전처럼 세 가지만 추려 볼까한다. 나는 명료한 의식을 위해 우선 심호흡부터 내어쉰다.



민 혜 님은 《창작수필》 등단. 저서 《장미와 미꾸라지》 외 5인 공저 수필집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