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9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고추 하나로 찬밥 물 말아 먹기 - 이상국
"마지막 밥 한 입의 반찬으로의 고추 꼭지 떼어내며 맑은 물 한 대접 마시고 나니 밥상 사방팔방 흩어진 씨앗들. 내년, 파랗게 싹 틔워 싱싱하게 자랄 또 다른 고추의 프로그램을 담은 노란 칩이 되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고추 하나로 찬밥 물 말아 먹기 / 이상국
햇볕 마구 쏟아지는 8월의 한낮. 대청마루에 앉아 밥을 먹는다. 찬 물 한 그릇에 찬밥 말아 한 입 떠 넣고, 빨갛게 약 오른 고추, 고추장 듬뿍 찍어 한 입 깨물면, 와아 쏟아지는 햇볕과 아침 이슬, 은은한 달밤 숨죽이며 우는 풀벌레, 서늘한 밤하늘 총총총 내려앉는 별빛과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별똥별과 물 아래 가던 한 마리 새와 개울물 모래 돌 틈 비집던 모래무지와 물방개, 하늘하늘 날던 까만 젓갈 잠자리와 고추잠자리의 군무. 봄부터 밤새워 울던 소쩍새의 울음과 밭고랑을 하염없이 헤매 돌던 장끼와 까투리의 숨바꼭질이며, 하늘 쩍쩍 갈라지는 천둥번개 속 철철 넘쳐흐르던 장대비가 어금니 사이에서 고막으로 정수리로 심장의 맥박 속으로 팔다리 근육에서 손가락 끝, 발가락 끝, 말초 신경 흔들며 사각사각 씹힌다.
물 말아 먹는 점심이나, 호박잎 싸먹는 저녁밥이나, 한두 술 뜨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침밥마저도 밥상엔 고추 하나면 족하다. 두 개 째엔 자칫 고추의 반을 남기든가, 삼분의 일을 남기든가, 사분의 일은 남기게 되는 법.
남겨진 고추의 사분의 일, 또는 삼분의 일, 또는 이분의 일이 음식찌꺼기로 버려질 때, 함께 뒹구는 햇볕과 별똥별의 기나긴 사선의 빛남, 금방 떨어질 것만 같은 이슬 한 방울, 소쩍새의 접동, 장끼와 까투리의 종종걸음, 파랑새 일직선상의 비상, 모래무지의 꿈틀거림. 이것들이 음침하고도 칙칙하며 시시한 뭇 음식찌꺼기들과 한꺼번에 버무려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마지막 밥 한 입의 반찬으로의 고추 꼭지 떼어내며 맑은 물 한 대접 마시고 나니 밥상 사방팔방 흩어진 씨앗들. 내년, 파랗게 싹 틔워 싱싱하게 자랄 또 다른 고추의 프로그램을 담은 노란 칩이 되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상국 님은 2001년 《현대수필》로 등단. 저서 《아내가 늙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