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9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어깨뽕 들어갈 날 - 구수현
"나는 오늘 아침도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맨발을 끌며 돌아다닌다. 또 인스턴트 차를 홀짝이며 스마트폰 하나 달랑 들고 노래를 듣거나 기사 따위를 훑는다. 이제 누룽지 티백이 충분히 우러나와 고소한 데다, 적당히 식은 것 같다. 곧 조금도 우아하지 않게 들이킬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청초하고 우아하며, 고상하고 유식한 날이 올 거라는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 나에게도 어깨뽕 잔뜩 들어갈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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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뽕 들어갈 날 / 구수현
아침에 눈을 뜨면 실크 잠옷을 홈드레스로 갈아입는다. 홈드레스는 발목까지 오는 길이에 다리 실루엣이 드러나는 찰랑찰랑한 느낌이 좋다. 그런 뒤 슬리퍼를 우아하게 스치며 거실로 나가 클래식 음악을 튼다. 그리고는 원두를 갈아 내린다. 미처 떨치지 못한 졸음은 경쾌한 바이올린 소리에 실려 보내고, 갓 내린 아메리카노 향내로 깊고 그윽한 하루를 연다.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며 그날의 조간을 읽는다. 내가 꿈꾸는 청초하고 우아하며, 고상하고 유식한 아침이다.
이렇게 해보려고 몇 번의 시도를 해보았다. 하루는 의류 회사에 다니는 남편이 옷을 몇 벌 가져다주었는데, 그 가운데 발목까지 오는 치마바지 한 벌이 눈에 띄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묵히자니 아까워 슬쩍 입고 거울을 보았다. 오호라~ 영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취미로 꽃꽂이 깨나 하는 여자처럼 보이는 게 아닌가. 분위기 있어 보이는 데다 발목에 살짝살짝 감기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욕실에 들어갔다 나오니 끝부분이 물에 젖어 여간 질척대는 게 아니었다. 쭈그리고 앉아 드라이로 말리는데, ‘이건 각본에 없던 모습’이라며 나도 몰래 입에서 구시렁이 흘러나왔다. 게다가 바닥에 앉을 때마다 천들을 쓸어 모아야 하니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중에는 허벅지까지 걷어 올려 앉게 되더라는…. 이러려면 뭣 하러 이 옷을 입어야 한단 말인가. 그 며칠간 바짓단으로 방은 잘 쓸고 다녔다.
10여 년 전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일본드라마를 재밌게 보았다. 클래식을 사랑하는 음대생들의 열정을 담은 내용인데, 드라마 ost로 사용된 클래식이 극의 재미를 더욱 높여 주었다. 전곡을 들어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흐지부지 시간이 흘러버렸다. 하지만 그 음악들은 내게 언젠간 꼭 들어야 할 숙제처럼 남아 있다. 때마침 얼마 전에 읽은 ‘내 아이를 위한 인문학 교육법’이란 책에서 ‘위대한 생각을 하려면 위대한 책을 읽고, 위대한 음악을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대체 뭘 들으라는 거냐’고 투덜대며 다음 장으로 넘기자, 친절하게도 클래식 추천 곡 목록이 적혀 있었다. 바로 음원 사이트의 검색창에 제목을 쓴 뒤 엔터키를 눌렀다. 식사 시간에 틀어놓고 아이들과 함께 들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요처럼 제목을 검색하면 바로 뜨는 것이 아니었다. 웬 노래들이 수도 없이 주르르르 매달리는지…. 뭘 들어야 하는 거야? 순간 멈칫했다. 같은 곡이라도 연주한 오케스트라가 많아 선뜻 재생 목록에 곡을 담을 수가 없었다. 결국은 아무 신빙성 없이 표지를 보고 끌리는 곡으로 주워 담을 수밖에.
그렇게 몇 곡을 반복하자니 뒷목이 뻣뻣해졌다. 결국 포기하고 음원 싸이트에서 추천해주는 ‘여름에 듣기 좋은 클래식’ 채널을 켜고 말았다. 다음 곡으로 넘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지루한 곡이 있는가 하면, 귀에 쏙쏙 박히는 곡이 있기도 했다. 그럴 땐 아이들도 먹던 밥숟가락을 들고 지휘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런데 그러고는 끝이었다. 몇 악장에 몇 막에 몇 중주에 뭔 장조니 단조니…. 당최 제목을 외울 수가 없으니 다음에 또 찾아 듣게 되질 않았다. 다만 ‘운명’이나 ‘사계’같은, 정말 곡의 느낌과 제목이 기막히게 들어맞는 경우에는 기억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 곡들은 유치원생도 알 것이니 유식하다거나 고상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클래식은 아무래도 무리였나 보다.
커피를 마신 지는 20여 년쯤 되었으나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고작 2,3년이나 되었을까. 3년 전쯤 원두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달지 않으면 커피가 아니라고 생각하던 때라 부엌 구석에 넣어 두었다. 그렇게 1년쯤 지나서 문득 생각이 나 그 원두를 꺼냈더니 그만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게 아닌가. 버릴 수도 없고, 향이 좋으니 신발장에 넣어 두기로 했다. 신발장을 열 때마다 어찌나 달콤그윽하던지. 후에 같은 선물을 또 받게 되었는데, 문득 어떤 커피인지 궁금해 알아보니 무려 '커피콩을 먹고 자란 담비의 똥'으로 만든 최상급 커피였다. 그런 것을 신발장 방향제로 쓰다니, 악 소리도 못 내고 애먼 머리만 쥐어뜯었다.
남은 원두는 커피메이커를 사서 정성껏 내려 마셨다. 썬탠 하듯 커피 향을 온몸으로 쐬는 그 순간이 좋았다. 하지만 걸러낸 여과지를 버리고, 망과 커피메이커를 헹궈야 하는 현실만은 외면하고 싶었다. 귀찮음에 또다시 원두의 존재는 잊고 인스턴트로 회귀하였다. 맛과 향이 아쉽지만 그냥저냥 따뜻한 맛으로 마셨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잊었던 원두를 내려 볼까 싶어 커피메이커 뚜껑을 열었는데, 아~ 원두 찌꺼기에 곰팡이들이 여기 퐁 저기 퐁. 그 뒤로 각성하고 남은 원두를 열심히 마셨는데, 그러고 부터인지 이제는 깔끔한 아메리카노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원두를 직접 갈거나 볶는 시간 자체를 즐길 줄은 모른다.
다도에 대한 로망도 있다. 정갈하게 우려낸 차를 두 손으로 받쳐 향을 음미한 뒤 마시는 모습. 무심한 듯 보이지만 기품이 넘친다. 그런 기품이 습관처럼 몸에 밸 수 있다면…. 쇼핑몰에서 정갈하게 주인을 기다리는 다기 세트를 볼 때마다 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쓰겠나 싶어 구경만 하곤 한다. 실제로 주방한 편에 국화차와 녹차, 허브차 등이 잔뜩 있지만 손이 가질 않는다. 우려내는 번거로움은 둘째 치고라도 맛을 즐길 줄 모르니 누룽지나 둥글레, 옥수수 티백 정도를 마실 뿐이다.
신문 구독도 해보았다. 웬 아저씨가 만 원짜리 다섯 장을 턱밑으로 들이밀며 “신문 좀 보라”는 말에 현혹되어 시작한 일이었다. 처음엔 현금도 받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게 되니 참 잘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런데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날수록 돈은 돈대로 나가고 세상은 재활용 박스 안에서만 쌓여갔다. 알아야 할 것들을 버리는 것에 가책마저 느꼈다. 그러나 신문을 펴지도 않고 그대로 쌓아두기를 한두 번 해보니 양심도 뻔뻔해졌다. 그저 버리러갈 때 무겁겠다는 생각만 들뿐. 나중에는 어찌나 가지런히 쌓이는지 다시 집집마다 돌려야 할 신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생선구울 때만큼은 덮개로 요긴하게 쓰였다.
책도 이것저것 참 끈떡지게 사들인다. 책 소개를 읽다보면 다 재밌을 것 같고 다 알아야 할 내용 같다. 책 읽는 속도가 책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문제다. 다 읽기도 전에 흥미가 꺼져버린적도 많은데, 그럴 때면 책 고르는 안목도 유식에 포함인 것을 절감하는 것이다. 책마다 앞부분만 까뭇까뭇한 것을 보자면, 중고 서적으로 팔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읽고 싶었던 것들을 책장에 전시해 놓고 가끔씩 그것들의 제목을 훑는 것만으로도 왜 이렇게 흐뭇한 걸까. 책이 인테리어 용품으로 쓰이는 현실.
나는 오늘 아침도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맨발을 끌며 돌아다닌다. 또 인스턴트 차를 홀짝이며 스마트폰 하나 달랑 들고 노래를 듣거나 기사 따위를 훑는다. 이제 누룽지 티백이 충분히 우러나와 고소한 데다, 적당히 식은 것 같다. 곧 조금도 우아하지 않게 들이킬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청초하고 우아하며, 고상하고 유식한 날이 올 거라는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 나에게도 어깨뽕 잔뜩 들어갈 날이 오지 않을까.
구수현 님은 수필가. 《수필과 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