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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9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실천하는 페미니스트 - 한지황

신아미디어 2019. 3. 15. 11:48

"결혼식에서는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왔다. 아닌 게 아니라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은 보기에 매혹적이다. 그러나 신부가 하객들의 미적 취향을 위해 웨딩드레스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웨딩드레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친구 딸이야말로 내 눈에는 실천하는 페미니스트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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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하는 페미니스트           /    한지황

 

   신부가 왜 안 보이지? 신부대기실에서 신부인 친구 딸을 찾아보았으나 어디에도 웨딩드레스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쟤 아니야? ” 함께 간 친구가 한 여성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사진에서 봤던 얼굴과 비슷했다. 근데 바지 차림이었다. 그나마 하얀 레이스로만 만들어진 바지는 멋있었지만 하얀 블라우스는 장식도 없이 지나치게 심플했다. 결혼식의 꽃인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평소 개성이 강했던 친구 딸이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느 결혼식이든 신부가 눈에 확 띄는 이유는 웨딩드레스 때문이다. 화이트가 주는 화려함은 어떤 컬러도 이겨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 드레스 자락은 또 어떠한가. 길게 늘어져 바닥을 스치는 그 우아함은 웨딩드레스가 아니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매력이다.
   너무 튀는 행동은 아닐까?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나중에 후회는 하지 않을까? 웨딩드레스를 입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버리다니 내 마음이 다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사라질 줄 모르는 의아함을 가득 안고 식이 시작하는 정원으로 나가 자리를 잡았다. 신랑 입장이 끝나고 신부 차례가 되어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또 신기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신부 양쪽으로 신부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란히 들어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주례가 없는 결혼식, 신랑 신부가 나란히 입장하는 결혼식 등등 색다른 결혼식에 참석을 해보았고 수중 결혼식이나 산 위에서의 결혼식 같은 이색 결혼식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은 신부가 부모와 함께 입장하는 결혼식은 처음이었다.
   부모와 함께 다정하게 손을 잡고 웃으면서 들어오는 신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좀 전까지 어색했던 내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어느 신부보다도 당당하고 멋지다는 감탄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신부라고 꼭 드레스만을 입어야 하나?
   축사를 하는 유명 탤런트가 드레스를 입지 않은 신부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찬사를 하자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혼에 대한 통념을 깨뜨린 것에 대해 하객들도 같은 감정을 느낀 것일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의 벽을 망치로 부수는 듯한 박수 소리에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밖에도 일반 결혼식과 다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식장 입구에 장식해 놓은 사진들도 일반적인 웨딩촬영과는 다르게 평소 찍은 스냅사진들이었다. 통과의례처럼 야외촬영과 스튜디오 촬영을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투자하는 요즘 트렌드와는 사뭇 다른 사진들은 진솔함으로 더 돋보였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순백의 웨딩드레스에 대한 로망이 있는데 친구 딸은 왜 웨딩드레스 입기를 거부했을까? 여자는 꼭 드레스를 입어야만 한다는 생각 자체가 남녀평등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을까? ‘여자는 이래야 한다.’라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름다운 신부라는 수식어는 중요하지 않을 만큼 그녀 스스로 자신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영국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에는 16세기 초의 철제 코르셋이 두 벌 전시되어 있다. 중세 여인들은 고문 기구와도 같은 코르셋 속에 상반신을 조이고 살아야 했다. 18세기에 들어 코르셋의 소재가 베로 완화됐지만 서너 살 때부터 착용하다보니 남성들은 배로 숨을 쉬는데 여성들은 가슴으로 숨을 쉬어야 했다. 그 당시 여성들은 여성미를 연출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인 것처럼 가는 허리에 집착했다. 조인 허리 때문에 여성들은 호흡 곤란으로 자주 기절했고, 저녁에 코르셋을 풀면 피가 배어나는 일은 다반사였다. 맨 아래 갈비뼈를 제거하는 수술이 유행할 정도였다. 1850년 코르셋으로 인해 세개의 늑골이 간장을 찔러 한 여성이 죽고 나서야 반 코르셋 운동이 일어났다. 코르셋이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남성의 소유물로 보는 시각에서 만들어진 발명품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코르셋을 입는 여성들이 많다. 남녀평등과 여성인권을 외치면서도 코르셋에 스스로를 억압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혼식에서는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왔다. 아닌 게 아니라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은 보기에 매혹적이다. 그러나 신부가 하객들의 미적 취향을 위해 웨딩드레스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웨딩드레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친구 딸이야말로 내 눈에는 실천하는 페미니스트로 보였다.



한지황 님은 수필가. 《한국산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