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8월호, 신작수필26인선 I 안전운전 - 이수안
"그 때문에 나는 요즘 별것이 다 걱정이다. 북·미 두 정상의 독특한 성향도 걱정이고 너무 과체중인 김정은의 건강도 걱정된다. 자국의 언론이나 관료들과 비우호적 관계인 트럼프의 입장도 마음쓰인다. 북·미 두 정상의 사정 또는 국내 정치 상황 때문에 우리 대통령의 안전운전에 걸림돌이 발생하는 일이 없기를 선조들도 굽어 살피소서."
안전운전 / 이수안
이슬비 내리는 고즈넉한 봄날이다. 읍내 갔다가 오는 길에 군청사거리 적색 신호등 앞에서 멈춘다.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데 청사 정문 쪽 활엽수의 초록이 내 시선을 끈다. 일 년 중 가장 싱그러운 오월 상순의 연초록, 내 마음도 비에 젖은 저 신록처럼 맑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초록불이 들어왔다.
기어를 드라이버에 놓고 가속 페달을 밞으며 전진할 때였다. 이미 신호등이 바뀌었는데도 맞은편에서 질주해오던 승용차가 달려들더니 좌회전 중인 내 차를 스치듯 지나간다. 내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지 않았더라면 사고가 날 뻔했다. 이쪽에서 잘해도 상대가 잘못하면 위험한 것이 운전임을 절감한다. 자동차 운전도 이러하거늘 한반도 비핵화의 운전대를 잡은 우리 대통령의 어려움은 얼마나 클까.
불과 4·5개월 전만 해도 한반도에는 전쟁의 공포가 팽배했다. 북·미 지도자가 틈만 나면 핵단추를 말하며 으르렁대고, 전 세계언론이 전쟁 가능성을 언급했다. 반면 침착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국민을 밖에서는 희한하게 본다는 기사도 나왔었다. 세계의 유력 언론이 전쟁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담담할 수 있었을까.
한국전쟁 휴전 65년 세월에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되어버린 남·북·미관계. 도저히 풀 수 없을 정도로 엉킨 실타래를 자르지 않고 풀어야 진정한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숙제 앞에서 관련국 지도자의 면면을 보면 우리 대통령의 고뇌가 얼마나 깊을지 짐작 간다. 인민의 삶이 극도로 빈곤해도 기어이 핵무기를 개발하고야 만 북한의 김정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예측을 불허하는 미국의 트럼프, 거기에다 벼룩이 눈물만큼이라도 도움은커녕 미국의 관료들을 움직여 일을 훼방 놓으려는 일본의 아베까지. 버거운 상대에 둘러싸인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 때마다 우리 대통령은 한반도 운전자론을 말했다.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고, 누구도 우리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할 수 없다.”
일관되고도 단호하게 의지를 표명하는 대통령을 신뢰했기에 우리가 평온한 일상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평화를 향한 흔들림 없는 의지에 파국으로 치닫던 북·미 정상도 마침내 화답하고 있다.
보름 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던 날, 전 세계의 눈과 귀가 판문점으로 향했다. 복숭아나무 주지 유인 작업 때문에 밭에서 살다시피 하던 나였지만, 그날은 일손을 멈추고 종일 텔레비전 앞을 지켰다.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보던 순간, 남북의 두 정상이 손을 꼭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다. 그 세계사적 장면에 삼천여 명의 기자들이 감격한 표정으로 환호성과 박수를 보냈고, 어느 외신 기자는 두 볼로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았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특히 내 마음을 끈 장면은 산책길과 도보다리 위의 회담이었다. 무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의 비무장지대, 그러나 실제로는 남·북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 그곳에서 우리 대통령이 북의 지도자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풍경이었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한적하게 속내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겨워 보이기까지 했다.
두 정상이 담소를 나누며 산책길에 나설 때 배경음악처럼 작은 새가 지저귀고 장끼는 꿩!꿩! 추임새를 넣었다. 도보 다리에 이르러 의자에 앉은 두 정상은 보는 이의 예상을 깨고 긴 대화를 이어갔다. 카메라 기자도 경호원도 물린 상태에서 오직 두 사람만의 회담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계가 그 내용을 궁금해 했지만, 막 연초록 순을 틔우는 활엽수와 산새 그리고 사월의 순한 바람만이 그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30분이나 정지 상태인 화면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고, 무성영화와도 같은 장면에 나의 상상력은 무한대로 커져만 갔다.
‘우리는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내 손녀들은 전쟁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유럽까지 갈 수 있을까, 우리도 저 산새 노닐고 마른 갈대 흔들리는 비무장지대를 거닐며 평화를 즐길 수 있을까…’.
하지만 정전 65년 세월에 헝클어진 관계를 푸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내가 잘해도 상대가 잘못하면 내 목숨까지 위험한 것이 운전 아닌가.
그 때문에 나는 요즘 별것이 다 걱정이다. 북·미 두 정상의 독특한 성향도 걱정이고 너무 과체중인 김정은의 건강도 걱정된다. 자국의 언론이나 관료들과 비우호적 관계인 트럼프의 입장도 마음쓰인다. 북·미 두 정상의 사정 또는 국내 정치 상황 때문에 우리 대통령의 안전운전에 걸림돌이 발생하는 일이 없기를 선조들도 굽어 살피소서.
이수안 님은 《문예운동》 등단. 수필집: 『날마다 해가 뜨는 이유』 『포도밭에서 쓰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