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수필과비평』[2019년 2월호, 통권208호 I 지상에서 길찾기] 오명을 벗으라 - 이주옥
"들판의 바람을 리본으로 둘러 묶어 투명한 화병에 한 다발 꽂아놓고 이제 그만 계란꽃이라 부르면 어떠랴. 아니 지나온 사람과 지나간 시간들이 그린 풍경화 속에 피는, 그리하여 이제는 망초亡草라는 오명을 벗고 지그시 ‘개 그리운 꽃’ 망화望花라 부르면 어떨까."
오명을 벗으라 - 이주옥
12월은 물기를 잃은 채 바삭거리고 있었다. K 선생님은 그곳이 북한산의 오목한 능선을 바라볼 수 있는 명당이라고 말하며 우리를 끌었다. 점심을 먹었던 식당에서 한 오 분쯤 걸었을까. 잎을 죄다 쏟아 내버린 나무들이 앙상했다.
나는 평소 북한산이라는 이름에서 다소 뾰족함을 느꼈다. 그렇기에 능선의 오목함은 어떨까 기대를 한껏 했건만 눈앞에 육중한 철골구조물이 정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이 시대 자본주의자가 매의 눈으로 그곳을 캐치했을 것이다. 북한산을 바라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전망이라고 광고하며 근사한 카페라도 짓는 것일까, 아니면 호롱불 모양의 전구를 조명등으로 단 닭이나 오리백숙집이 탄생하는 것일까. 한껏 아쉬운 마음으로 까치발한 채 능선자락만 넘겨다보고 있는데, 바짓자락 밑으로 연갈색 철골구조물과 같은 빛깔의 풀더미가 수북하게 밟혔다.
그 이름은 개망초다. 한때는 연초록 줄기와 잎을 지니고 하늘거렸을 풀꽃. 줄기에 품었던 수분이 바람에 날리고 피었던 꽃송이는 햇살에 말라 온통 바삭해진 채 세찬 겨울바람에도 흔들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줄기, 잎, 꽃의 구분 없이 하나의 꼬투리가 되어 12월의 바람 속에 정물처럼 꽂혀 있었다. 이제 어느 날 푸짐하게 눈 한번 내리면 맥없이 쓰러져 거름이 되리라.
일제 강점기 때 슬며시 침목에 묻어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 죄로 그 이름 붙었을까. 이곳저곳 가리지 않는 무던한 성정 탓에 천덕스런 이름 하나 간신히 얻었을까. 꽃의 모양이 계란 프라이를 닮았으니 계란꽃이라고, 고운 눈을 가진 누군가는 그렇게도 부르지만 싫은 내색 한 번 못하고 기꺼이 개망초가 되었으리라. 그게 차라리 꽃으로 불리는 것보다 속 편했을 터.
정호승 시인은 “잡초란 인간이 붙인 지극히 이기적인 이름일 뿐”이라고 말했다. 세상에 꽃이나 풀이나 제각기 고유의 생명력을 누리고 피어날 자격이 있으련만 인간의 잣대로 이름 붙이는 것은 때로 너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지 않은가. 아무리 척박한 땅에 이름 없는 풀이라도 뿌리내려 무더기로 피어 있으면 영락없는 꽃인 것을.
개망초 또한 가늘지만 건강한 줄기에 이파리 성성하고 어엿하게 꽃도 피니 어디로 보나 꽃이건만 끝내 이름이 망초亡草다. 타국에서 받은 설움을 몽땅 품어 안고 있는 것 같아서 애잔하다. 거기다 무슨 심술인지 한 술 더 떠 ‘개’ 자까지 붙여 놓았으니 그 면구함을 어이할까.
앞에 ‘개’ 자를 붙여 꼴을 더 망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했던 일이 별 소용없는 무위가 됐을 때 흔히 ‘개털 됐다.’고 한다. 아마 개의 털은 밍크나 여우의 털만큼 가치가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 망신당한 것이 더없이 억울하고 민망할 때는 ‘개망신’이라고 하며 그 감정의 강도를 높이고 로또에 대한 기대는커녕 해몽할 필요성도 없는 무의미한 꿈은 그야말로 ‘개꿈’이다. 더할나위 없이 몸고생, 맘고생이 겹치면 말 그대로 ‘개고생’. 기껏 때 빼고 광내고 나섰으나 별 표시도 안 나며 시선도 끌지 못하면 그야말로 ‘개폼’ 잡고 마는 일이니 얼마나 머쓱하던가.
하지만 이즈음엔 ‘개’ 자의 반란이 일어났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개 맛있다’ 하고 예쁜 사람을 보면서 ‘개 이쁘다’고 표현한다. 좋아도 그냥 좋은 것보다는 ‘개 좋다’고 표현하면 한층 그 강도가 세지니 이것도 환골탈태인가. 평범한 단어 앞에 비속한 ‘개’ 자 한 개 덧붙임으로써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감정표현을 격하게도 하고 자못 그 위상까지 높아질 때도 있으니 ‘개’ 자의 빛나는 환복이다. 글자 하나 덧붙임으로 절반 정도만 발산됐던 찌뿌둥한 감정의 찌꺼기가 일순간 해소되기도 하니 오히려 톡 쏘는 사이다 낱말이라고 억지 부릴 만도 하다.
지난 가을바람에게 색깔을 모두 뺏긴 개망초는 연갈색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제 이름 개망초답게 아무리 들여다봐도 진기 한 줌 없이 한寒 데서 마르고 있었다. 잔뜩 바삭한 것이 손이라도 대면 부스스 부서질 것 같았다. 아무리 기를 쓰고 꽃을 피워 요염을 떨고, 가는 줄기에 바람을 머금고 살랑대도 누구 하나 어여쁜 꽃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계란 노른자 같은 샛노란 꽃술을 품고 혹여 식탁 위 화병에라도 무더기로 꽂혀 있으면 그나마 체면이 설 텐데 그런 호사도 쉽지 않다.
물기, 색깔 다 빼앗기고 푸석거리며 엉켜 있으나 내 눈엔 12월의 꽃이었다. 갖은 설움에 눈물 콧물 다 빼고 개망초라는 오명을 깔고 묵묵히 12월을 지키고 있는 게 차라리 결연하다. 꽃으로 쳐주지 않으면 어떤가. 줄기에 악착같이 붙어 생의 끝까지 통째로 함께 말라가는 잎사귀와 꽃잎이, 더없이 풍요로웠으나 이제는 잎을 다 떠나보내고 스산하게 홀로 서 있는 나목의 처지보다 낫지 않은가.
이 나무에 치이고 저 꽃에 치일 법도 하건만 온 들에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나 군락을 이루니 오기였던가, 방만이었던가. 아무 데나 흙이 있으면 흔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무더기로 피어 하늘거리는 폼을 보면 이젠 그만 꽃이어도 충분하다. 들판의 바람을 리본으로 둘러 묶어 투명한 화병에 한 다발 꽂아놓고 이제 그만 계란꽃이라 부르면 어떠랴. 아니 지나온 사람과 지나간 시간들이 그린 풍경화 속에 피는, 그리하여 이제는 망초亡草라는 오명을 벗고 지그시 ‘개 그리운 꽃’ 망화望花라 부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