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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9년 2월호, 통권208호 I 지상에서 길찾기] 그녀를 쓴다 - 국도운

신아미디어 2019. 2. 21. 10:29

"먼저 피어 늦게 지는 고단함으로 아직 오지 않는 그들의 봄을 예비하리라. 그들에게도 봄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경계에 선 자의 삶을 아퀴 짓고 나는 비로소 봄을 놓고 가리라."


 




   그녀를 쓴다      -    국도운


   드라마 속 그녀가 우리를 속이는 것과 같이 봄이 온다. 그녀는 한밤중에 잠자리에 들 때도 화장을 지우지 않고 고운 얼굴로 잔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의 민낯과는 사뭇 다르다. 한낮의 따스한 봄기운은 아침, 저녁으로 시린 얼굴과 공존하며 서 있다. 4월에도 눈이 내리고, 중금속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내려앉은 미세먼지는 사람 뿐만 아니라 기계의 엔진까지도 호흡을 가쁘게 재우친다.
   그녀는 한겨울 주택 마당에 접한 거실의 얄따란 미닫이문을 활짝 연 채 얇은 옷을 입고 웃으며 대화한다. 아직 들판은 얼었다 녹기를 되풀이하는 해빙기지만, 사람들은 꽃 피는 봄이 왔다고 들떠 있다. 봄, 이제 됐다고 외투를 벗고 장갑을 벗으면 여전히 손등이 시리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자 해도 아직 혹독한 겨울의 기억이 남아 움츠러들게 한다.
   그녀의 방 미닫이문은 잠금장치가 없다. 잠을 자면서도 누구 하나 문을 열고 위협하는 불청객도 없다.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봄은 도둑처럼 잠금장치 없는 우리 마음을 열고 들어온다. 꽃이 한창일 때도 중국발 황사가 온 세상을 뒤엎고, 꽃샘추위는 갓 피어난 어린 새싹들을 쓸어버린다.
   그녀의 대화는 언제나 질서 정연하다. 누군가의 말이 끝나야 다음 사람이 책을 읽듯이 말한다. 현실에서처럼 중간에 끼어들어 상황을 뒤죽박죽 만드는 사람이나 말을 더듬는 자나 단어를 잘못 쓰는 자도 없다. 한겨울에도 착각하는 꽃이 있어 망울을 터뜨리고 한여름에도 성질 급한 얼음이 있어 물을 타고 나오기도 한다. 우리네 인생도 틀을 벗어난 누군가가 있어야 숨통이 트이고 웃을 일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녀가 집 나갈 때 딸랑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나왔는데도 날마다 화려한 옷을 갈아입는다. 분명 수십 개의 큰 가방으로도 모자랄 부피일 텐데, 그 작은 가방 하나에 그 많은 욕심을 다 구겨 넣는 마술을 부린다. 봄에 가출이 많고, 급작스럽게 심근경색으로 딴 세상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계절이다. 봄의 그 수많은 가출을 가방 하나에 감춰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
   그녀가 돈 많은 자든 애옥살이하는 자든 상관없이 사고나거나 다치면 언제나 1인실이나 특실에 입원한다. 돈 많은 사람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먹고살 것도 없이 하루 벌어 사는 사람은 그럴 수 없다. 6인실, 9인실 그 복잡한 곳에서 보호자와 병문안 온 사람들까지 합쳐 그야말로 시장통이 따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심각하게 아파도, 잠 좀 자려 해도 잘 수 없는 곳이 보통의 사람들이 가는 입원실 풍경이다.
   그녀가 커피숍을 가든 식당에 가든 오직 그녀와 마주 앉은 상대방과의 대화만 들린다. 주변의 그 많은 사람은 그들의 목소리가 좀 더 잘 들리게 모두 침묵하고 있거나, 말하는 시늉만 하고 있다. 봄에는 다른 사람의 말들이 잘 들리지 않는다. 오직 봄과 나만이 있는 것 같은 마음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들리는 듯하고, 그 상대방에게도 내 소리만 들릴 것이라 여기게 한다. 봄은 그렇게 우리 안에 주인공처럼 들어앉는다.
   그녀는 버스나 택시를 세워 놓고 한참을 서서 작별 인사를 나눈다. 그 긴 작별의 순간을 버스나 택시 기사가 잘도 기다려준다. 현실에서는 애틋한 작별에 빠진 그들을 버리고 버스가 떠나든지, 성마른 택시 기사의 툽상스러운 소리가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봄은 자신이 오래도록 우리를 기다려 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 화려한 봄에 취해 있는 순간,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면 봄은 가고 없다. 청춘이 그랬다. 그 안에 있는 동안은 절대로 그것이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을 못 갖게 한다. 달콤해서 봄날이고, 짧아서 그리운 것이라는 진리를 봄을 벗어나고서야 알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모두가 봄의 민낯을 외면하고 천편일률적인 벚꽃과 장미 향을 닮고자 할 때, 아직 남아 있는 겨울의 거센 바람을 맨몸으로 맞으며 밤낮없이 스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들꽃이 되는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한 번 들여다보는 이 없이 아스라이 사라진다 해도 결코 그 누구도 본 적 없고 만져본 적 없는 영성궂은 꽃망울을 피워 나만의 색깔로 남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힘이 있다면, 유월이 다 되도록 누더기를 벗지 못하고 지하철역 차디찬 콘크리트 위 찢어진 종이상자에 달팽이처럼 몸을 숨기는 이들의 시린 등을 기억하는 데 쓰는 것이다. 먼저 피어 늦게 지는 고단함으로 아직 오지 않는 그들의 봄을 예비하리라. 그들에게도 봄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경계에 선 자의 삶을 아퀴 짓고 나는 비로소 봄을 놓고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