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수필과비평』[2019년 1월호, 통권207호 I 세상 마주보기] 김金 할배 - 백송자
"서쪽으로 난 작은 창문을 건너온 겨울 햇살이 할배의 둥근 등에서 부서진다.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문이 철커덕 잠기는 그 순간이 할배에게 아직은 오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돌아선다. 절뚝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다중주택의 현관 앞까지 따라 붙는다."
김金 할배 - 백송자
“무 무 무, 무니 안 열려유, 무 무 무니.”
어눌하다. 얼굴은 상기되고 땀범벅이다. 하필 내가 막 나가려던 참이다.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다. 왜 내게 와서 그러냐며 삐딱한 말투로 핀잔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분이다. 1945년생 해방둥이. 충남 예산 출신 김金 할배.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도로는 빙판이 되어 젊은이들도 미끄러질까봐 발을 동동거리던 그날, 빛바랜 얇은 점퍼를 입고 더욱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왔다. 뜨겁게 달궈진 난로 옆자리를 권하며 차 한 잔을 드려도 마시기를 거부했다. 당뇨가 있다는 이유다. 잠만 잘 수 있는 방 한 칸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며 꼭꼭 싸매둔 인생의 보따리를 조금 풀었다. 장돌뱅이였다. 각 지역의 축제장에서 군밤 장사를 해서 먹고 산다. 단, 찜질방이나 여관만을 왔다갔다 할 수가 없어 교통이 편리한 대전에 거점을 마련해야겠다며 싼 방이어야 함을 강하게 덧붙였다.
옥탑방으로 결정했다. 일층의 신축 원룸이 혼자 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인데 이는 거절했다. 임대료 때문이다. 이사한 후 가끔 봤다. 보일러를 가동해도 온수가 미지근하다, 전기세 고지서가 나왔는데 요금이 너무 많다는 둥 이런저런 이유를 들고 사무실을 찾아왔다. 다른 임차인들이 내게 이렇게 요구했다면 단박에 거절했을 일이다. 그러나 나는 매번 군소리 대신 직접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걸음걸이가 절뚝거려서도, 독거노인이어서도 아니다. 할배가 궁금증이 생길 때 물어볼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야, 라는 착각이 이유다.
계약 기간 이 년이 다 되어 갈 즈음이었다. 이사해야겠다며 찾아왔다. 많이 핼쑥해진 모습이다. 그동안 난 할배를 까맣게 잊고 지낸 게 사실이다. 한동안 보이지 않았지만 깊이 생각지 않았다. 다시는 옥탑방에 살지 않는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임대료가 싸고 계단 운동도 하고 겸사겸사 좋으리라 여긴 것이 불찰이었다며. 이번에는 일층 방을 얻었다.
직접 이삿짐을 날랐다. 나도 조금은 도와드릴 겸 오층을 뛰다시피 올라갔더니 내 다리가 후들거린다. 호흡도 거칠다. 이게 문제가 아니다. 천장이 경사진 옥탑방 싱크대 앞에 구부정하게 서서 수세미로 타일 벽을 박박 문지르고 있는 할배의 등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임대인의 목소리. 살벌하다. 해도 해도 이리 더럽게 살았느냐며 면전에서 마구 해붙이는 임대인. 에어컨은 수시로 고장 나서 방은 찜통이었고 또 얼마나 추웠는지 하는 임차인의 혼잣말에는 힘이 없다. 이럴 때는 얼른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때마침 점심 시각이다. 할배에게 갈비탕 한 그릇을 대접하는 거로 한바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났다.
비록 식당에서의 밥상이지만 함께 마주 앉다 보니 식구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야 나는 이것저것 묻는다. 가족은 어찌 되며 그간 무슨 일을 하고 사셨는지. 아내와는 오래전 이혼한 상태라고 말하면서 낡은 지갑 속의 사진 한장을 보여준다.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웃고 있다. 딸인데 죽었더라고. 한때는 잘나가던 외항선 조리사였으나 배다른 형에게 가진 돈을 다 뜯기고 무일푼이 되어 근근이 살아간다는 이야기. 심지어 신용불량자라니 의외다. 밥을 다 먹자마자 함께 주민 센터에 갔다. 내 보폭에 맞추려고 허둥대는 걸음이 더 절룩거린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을 도와주는 내게 사회복지사는 궁금해 하는 눈치다. 관계에 대하여. 집으로 오는 길에 붕어빵 한 봉지를 안겨드렸다. 세상은 춥지만 갓 구운 붕어빵처럼 따듯한 날들이 할배의 삶에도 깃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얼마 후 수급자가 되었다. 생계와 주거, 의료급여를 받게 되어 한결 생활이 나아졌다. 그동안 수입은 방세와 병원비로 거의 다 지출되었다. 전기, 전화, 도시가스 등에서도 할인 혜택을 받았다. 파스에만 의존하던 무릎 관절염도 통증클리닉을 다니면서 걷기가 훨씬 더 수월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배달해 주는 도시락을 자원봉사자에게 받고부터는 밥맛도 좋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절뚝거리는 걸음에 허름한 옷차림이다. 그래도 걸음에 리듬이 실리고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가족이 있어 돌봐주는 어르신 같은 분위기다. 따지고 보면 국가가 할배의 든든한 가족이다.
국가가 유일한 가족인 할배. 모름지기 가족이라 함은 가까이서 부딪치며 살아야하는데 할배는 그렇지 못하다. 할배의 가족은 멀고 높은 곳에 있다. 그래도 가족의 울타리에서 비바람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다. 소소한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할배, 어찌 내가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 내칠 수 있단 말인가.
열쇠 수리 기사가 와서 드르륵 기계 소리를 내며 방문을 열고 디지털 도어록의 건전지를 갈아 끼워 주고는 출장비를 받자마자 힁허케 가버린다. 이틈에 나는 방을 스캔한다. 시커먼 양은 냄비와 어지럽게 둘둘 말린 이불이 눈에 뜨이지만, 많이 지저분하지는 않다. 서쪽으로 난 작은 창문을 건너온 겨울 햇살이 할배의 둥근 등에서 부서진다.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문이 철커덕 잠기는 그 순간이 할배에게 아직은 오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돌아선다. 절뚝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다중주택의 현관 앞까지 따라 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