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수필과비평』[2019년 1월호, 통권207호 I 사색의 창] 과객過客들의 세상 이야기 - 김원
"할아버지 틈에 끼여 과객들의 이야기를 신기하게 듣던 꼬마는 망구望九의 늙은이가 되어 읽던 책을 접고 혹시나 하고 삽작문을 내다본다. 비를 맞은 과객이 하루 묵고 가자고 들어오지나 않을지 그들의 환영에 빠진다. 문득 최남선의 시 구절이 생각난다.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 소리 나니/ 오지 않는 이가 기다려져/ 열린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과객過客들의 세상 이야기 - 김원
오늘처럼 비 오는 날엔 독서가 제격이다. 들고 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있자니 우리 할아버지들이 생각난다. 십 년전에 읽었지만 까마득하기만 해 다시 한번 정독을 할 셈 치고 책을 폈다. 그때 친 밑줄은 분명 당시의 느낌이 뭔가 들어왔기에 쳤겠지만, 지금 읽어보니 전혀 그게 아니다. 그저 맹탕이다. 그만큼 첫번 읽은 것은 기억에 남는게 없다. 이번에는 휴머니스트 조르바를 통해 여행과 꿈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눈에 들어온다.
화자인 ‘나’는 여행을 하지 않고 조르바를 통해서 세상물정을 알아차린다. 인간 영혼 구석구석을 누빈 사람, 조르바가 이야기를 통해 마케토니아의 산 전체의 숲의, 냇물이, 코미타지 게릴라, 부지런한 여자, 건장한 사내, 수도원, 무기창고, 지아의 게으름뱅이, 발칸반도 등을 앉아서 듣고 본다. 여행없이 세상 이야기를 알게 된다. 얼마나 좋았으면 “여행을 뭣 때문에 해. 그, 먼 카디아나 카네아에 왜 가? 이곳을 지나가는 카네아 사람들을 만나 궁금한 걸 듣고 물어 보면 되지. 왜 그 고생을 해.” 크레타섬의 한 할아버지 말을 인용한 것이다. “나”는 그런 재미로 크레타섬 바닷가에 나가 앉아 매일같이 조르바의 이야기를 듣길 원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지만 발품팔지않고 세상을 구경한다니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궁금하다.
어릴 때 내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우리도 그리스인 조르바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다니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세상 이야기를 전하던 과객이 한국의 조르바인지도 모른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과객을 통해 듣던 시절이 꽤 까마득한 이야기 같지만 적어도 일제 때까지가 그랬다. 시골 농촌에 살던 어린 나는 신문도, 라디오도 없던 시절에 세상 이야기를 귀동냥하는 유일한 길은 지나가는 과객을 통해서였다. 사람을 싣고 위로 올라가는 기계(엘리베이터)가 있다느니, 전차가 앞뒤가 없다는 이야기 등이 동화 같기도 하고 거짓말 같기도 했던 것이, 그로선 이미 한물간 소식일지 모르지만 촌구석에 묻혀 사는 우리로선 신기하고 귀가 쫑긋했다. 나는 그 과객이 오는 날이 기다려졌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보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기한 세상 이야기에 호기심이 더 했다. 과객들의 이야기에 희비를 달고 사는 세상이 지금 생각하면 한참 뒤떨어져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순수하고 동화 같은 세상 이야기인가.
과객이 우리 집에 들러 하루를 묵고 가는 날엔 이웃 할아버지들이 다 모여 신기하듯 귀를 세우고 듣는다. 두 칸 사랑방은 아랫방과 윗방으로 나누어져 가운데 미닫이문이 놓여있다. 윗방엔 과객이 머물고 아랫방엔 할아버지와 이웃 노인들이 모여 앉아 장죽에서 연기를 연상 뿜어내고 있었다. 방 안은 매캐해왔다. 미닫이 사이로 지껄이는 세상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이다. 그 세상 소식은 짧게는 한 달이나, 아니면 몇 달 전의 것일 수도 있다. 듣는 우리에겐 상관할 바 없다. 단지 신기할 뿐이다. 가슴 두근거리는 이야기들로 들려왔다. 며칠씩이나 고생하면서 한양에 가지 않고 앉아서 그곳 이야기를 듣자니 마치 크레타섬의 할아버지처럼 과객의 요술 방망이에 웃고 울었다.
하루는 해 넘어갈 무렵 포수가 찾아와 묵길 원했다. 마을에서 한쪽 깊은 계곡에 있는 우리 집은 사냥 길목이나 다름없어 포수가 자고 가는 일이 잦았다. 일제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매일같이 수업을 팽개친 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쪼들리는 전쟁물자를 송출해 내던 학교생활을 떠나 마침 시골 할아버지 집에서 놀고 있었을 때다. 포수 과객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일본이 곧 망한다는 것이다. 모두들 일본이 승전하고 있다고 세뇌되고 있었는데 가히 충격적이었다. 누군가가 문밖에서 듣지나 아니할까 안절부절못했다. 매일같이 순사들이 조선사람을 앞세워 시골마을을 뒤지며 공출을 독려하고, 놋그릇과 쇠붙이들을 압수해 가고,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징용, 보급대, 정신대등이 벌어지던 때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긴장된 시기에 사랑방 할아버지들은 더욱 간을 졸였다. 그러고 얼마 뒤 일본이 정말로 망했다. 시골 할아버지들은 그 과객을 점쟁이라고 불러댔다.
장사하는 과객들도 자주 온다. 시골서 생필품들인 성냥, 면경, 바늘, 실, 구리무(크림), 우황청심환, 고약, 머리빗, 물감가루, 옥양목 같은 물품들을 도회지에 가서 사지 않고 집까지 찾아와서 외상으로 두고 가니 얼마나 생광스러운가. 그들은 다른 곳을 한 바퀴 돌아 며칠 뒤에 다시 와서 곡물이나, 현찰을 받아간다. 농촌에는 현금이 없어 곡물을 받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세상이야기도 들려 주지만 처녀, 총각들의 중매도 해준다. 재 너머 마을이나 강 건너 이웃을 두루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집에 참한 규수가 있는지 알게 되고 믿고 지내는 단골 고객이기도 해 성사 확률이 높다. 지체 높은 명문 반촌에서야 신분계층끼리 혼인을 하지만 그렇지 못한 하층에서는 과년한 처녀총각들이 이런 과객들의 중매로 장가들고 시집을 간다.
가끔은 과객이 장기간 식객食客으로 머물기도 한다. 그러면서 일꾼과 함께 농사일도 거들어 주고, 어느 경우는 손재주 있는 과객이 들어와 잡동사니 생활도구들을 만들어 장인匠人 노릇까지 한다. 때론 스님도 자고 간다. 과객들은 하나같이 가난했지만 마음은 부자였다. 매임 없는 자유인이다. 그런때문인지 할아버지는 하룻밤을 묵고 가든지 몇 달씩 머물다 가든지 과객을 나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법 없이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천의 얼굴을 가진 조르바가 때로는 터키인으로, 그리스인으로, 또는 아르메니아인, 유럽인 등으로 나타났다 가도 떠날 때는 칼로 베듯 깨끗이 가고, 매임이 없고 미련 없이 훨쩍 사라져 버린다. 모든 것이 끝난 순간에 해방감이 찾아 온다. 버리는 것이 해방감을 충족시킨다. 니체는 인간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아주 합리적인 사고의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본능적인 야성과 비합리적인 인간을 말한다. 과객들이야말로 매임이 없는 해방감으로 사는 비합리적인 자유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하지 않고, 그렇다고 내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오직 오늘만을 위해 살고 그것만을 생각하는 자유인이다. 행복을 누리는 이는 오늘이 있을 뿐이다. 아니 지금 이 순간이 그들에겐 더 소중하다.
그때 할아버지 틈에 끼여 과객들의 이야기를 신기하게 듣던 꼬마는 망구望九의 늙은이가 되어 읽던 책을 접고 혹시나 하고 삽작문을 내다본다. 비를 맞은 과객이 하루 묵고 가자고 들어오지나 않을지 그들의 환영에 빠진다. 문득 최남선의 시 구절이 생각난다.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 소리 나니/ 오지 않는 이가 기다려져/ 열린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