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수필과비평』[2019년 1월호, 통권207호 I 사색의 창] 공재共在 - 권은자
"‘오류다.’라는 사실을 아는 지점이 새로운 인식의 출발점이다. 오류에서 진리를 찾고 진리에서 오류를 찾는다. 안에서 밖을 보고, 밖에서 안을 보려고 애쓰는 것이 그녀가 강아지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라 믿는다. 마음의 균형이 깨져 두통이 있을 때 내가 논을 보러 가는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내가 찾는 답을 알려주는 것들이 공재해 있다."
공재共在 - 권은자
“삶과 연애 중이라고 생각하세요.” 내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어느 시인의 이 말을 중얼거리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몇 해 전부터 논을 감상(?)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논을 보러 가려고 차를 고속도로에 올린다. 자동차는 휘어진 도로에서도 미끄러지듯 안전하게 달린다. 운전을 시작한 지가 삼십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심한 커브 길을 돌 때면 아직도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차가 커브 안쪽으로 쏠리지 않을까, 하는 무의식 중의 염려가 있어서다. 차는 내 걱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도로 위를 거침없이 잘 달린다. 안쪽으로 향하는 구심력을 상쇄 할 다른 방향에 여러 힘들이 존재하기에 가능하리라. 내가 그 힘들의 역학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 졸이지 않으며 운전할 수 있다.
논을 바라보는 일이 가슴을 뛰게 하기도, 고요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봄날, 논바닥이 보이는 말간 물속에 연둣빛 어린 모가 가지런히 줄지어 심어 있다. 어린 모가 자라면서 벼 사이로 논바닥의 말간물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면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운 비밀을 나만 알고 있을 때와 같은 야릇한 감정이 일기도 한다. 시간 날 때마다 논을 보는 일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계속 이어졌다. 며칠 만에 보면 쑥 자라있고 또 얼마지나면 초록 잎이 한층 짙어져 있다.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를 보는 것처럼 흐뭇하고 신선했다. 곡식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들이 혹시 내 발소리와 내 차 소리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니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느새 벼가 누릿해졌다.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햇살이 좋은 늦은 아침이나 성장이 왕성한 한낮 시간, 해가 기우는 시간에도 가끔 논을 보러 온다. 햇살 아래서 빛나던 초록이 가슴을 짓누르듯 무겁게 변해 있을 때도 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세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같은 대상이라도 다르게 보이기도, 달리 볼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건가. 그래야 사물을 이해하기 쉽고 내 주변의 존재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다.
조금 전까지 바람에 흔들리던 벼는 고개 숙인 이삭과 달리 벼잎을 꼿꼿이하고 하늘을 향해 서 있다. 한 자락 지나가는 바람에 또 살랑거리며 잔물결을 이룬다. 소리도 들린다. 여린 쇳소리 같기도 하고 풀벌레들의 사르락거리는 울음 같기도 하다. 주변의 소리에 한층 귀를 기울인다. 풀벌레 소리, 긴 선율을 만드는 새의 지저귐이 멀리서 들린다. 고요함 속에서도 분주함이 느껴진다. 이따금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멀리 공사장에서 들리는 중장비소리도 적당한 간격으로 섞여서 들려온다. 한참 듣고 있으면 소음도 거슬리지 않고 친숙해진다. 눈이 평화로우니 마음마저 순해지는 건가. 약한 존재끼리의 공감이 가끔은 위로가 된다. 통한다는 것은 서로를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일 년에 네댓 번 가족 모임에서 얼굴을 보는 그녀를 얼마 전에 만났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나의 물음에 “강아지와 산책할 때 가장 행복해요.”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반년 전 그녀는 지방의 중소도시로 이사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녀의 막내아이도 전학을 시켰다. 그녀는 한두 해 전부터 우울증을 앓았었다. 그랬던 그녀의 행복하다는 말이 얼마나 반갑고 다행스럽던지. 산책할 때 행복하다던 말 속에 담긴 뜻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기에 동질감에서 오는 친밀감마저 느껴졌다. 그녀는 틈나는 대로 들길을 걷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매일매일의 날씨를 느끼며 살려고 애썼다고 했다. 거센 바람이 부는 날도 있었고 어깨에 내려앉는 햇살 덕분에 행복한 날도 있었다. 예전과 다르게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것들도 찾았다며 가만히 웃었다. 그렇게 하면서 평상시의 그녀로 돌아왔다.
그녀가 아프다는 것을 처음 어렴풋이 감지했을 때 나는 혼란스러웠다. 난 그녀의 삶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전문직 일을 가졌고, 흔히 말하는 단란한 가정을 잘 꾸리며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 타인의 삶을 겉만 보고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그녀를 통해 또 한 번 알게 됐다. 그녀에게도 그녀만의 고충과 서러움이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시간에서 비교적 빨리 헤쳐 나왔다. 생기 넘치는 한때의 환한 순간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어두운 시절도 섞여야 비로소 한사람의 삶이 구성된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새삼스레 보게 되었다.
‘삶과 연애 중이라고 생각하라고 심리상담사가 말했다.’는 내가 자주 중얼거리는 허수경 시인의 시 한 구절이다. 내가 하는 말이 상대에게 진실로 들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억울하거나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때, 나는 시인의 심리상담사를 흉내 내어 내게 말한다. 연애가 늘 행복하기만 한 것도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달콤할 때도 씁쓸할 때도 있다. 때로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가 야속할 때도 억울할 때도 있을 거다. 생각하고 계획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도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속은 시끄러워도 연애라는 말은 동글동글 부드럽다. 삶의 겉과 속은 보는 것과 정말 다르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것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삶에는 영향을 미치는 온갖 방향에 여러 힘이 존재한다. 내가 원하는 쪽으로 향하는 힘도 있지만 내가 도망치고 싶은 순간을 만드는 것들도 있다. 삶이 중심을 잃지 않고 두 발을 땅에 붙여 든든히 지탱하려면 상반되는 여러힘이 필요하다. 안으로 향하는 힘이 있으면 밖으로 향하는 게 있고, 위쪽으로의 힘이 있으면 아래로 향하는 힘이 반드시 있다. 서로 다른 여러 힘들이 공재하기에 상쇄 보완되고 합쳐질 때 삶은 넘어지지 않는다.
‘오류다.’라는 사실을 아는 지점이 새로운 인식의 출발점이다. 오류에서 진리를 찾고 진리에서 오류를 찾는다. 안에서 밖을 보고, 밖에서 안을 보려고 애쓰는 것이 그녀가 강아지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라 믿는다. 마음의 균형이 깨져 두통이 있을 때 내가 논을 보러 가는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내가 찾는 답을 알려주는 것들이 공재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