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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6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섬 - 박준수

신아미디어 2019. 1. 30. 10:30

"텅 비어 있었음에도 뭔가 가득한 것이 느껴졌던 섬. 그 섬이 멀어진다. 자줏빛 노을과 함께 땅거미에 묻힌다. 뱃머리 너머는 불빛 속에 끈적거리는 항구가 분주하고 자유롭게 그리고 마음껏 퍼덕거렸던 상상의 날개를 접는다. 운전석에 앉는다. 숨 가쁜 섬 도시를 향해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    박준수

 

   간밤에 티브이 시청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월드컵 축구 대표 팀이 본선에 진출하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시합이긴 했지만 이른 새벽 나들이길이 예정된 만큼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야 했다. 자정이 한참 지난 후에야 중계방송이 끝나고 눈까풀이 무겁다 했더니 그만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깼을 때는 창이 훤한 여섯 시. 괭이세수하고 옷가지며 필요한 것들을 챙겨 차 뒷좌석에 싣고 집을 나섰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중천. 바둑판 주차장에 어렵사리 한자리 차지하고 서둘러 선착장에 갔다. 대합실에는 피서 행장을 한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승선을 기다리고 내가 타야 할 배도 두 시간 후에나 있었다. 하릴없이 상점 주변을 맴돌다 매대에서 밀짚모자와 근동 마을에서 생산되었을 대나무 낚싯대도 하나 골랐다.
   엔진의 힘찬 시동과 함께 카페리가 선착장을 떠난다. 12 놋트. 40분 후에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노老 선장의 대답이다. 한소끔 해풍이 지나가며 밀짚모자 들썩여 나의 방문을 반긴다. 고물 프로펠러에서 메밀꽃 무성히 피고 물이랑 겹겹이 번지다 이내 지워진다. 끝간 데 없이 펼쳐진 바다, 스크루 회전 동력에 힘입어 가속하는 카페리, 과학의 비약을 찬양하기 앞서 하늘과 바다의 광대무변한 섭리자의 피조물 앞에 눈귀가 먹먹해진다. 멀어진 항구는 갈매기 한 무리가 은가루처럼 반짝이고 그곳은 삶의 현장이 아니라 화폭 속의 풍경화로 남는다.
   섬들이 다가왔다가는 멀어진다. 섬이 떠다닌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오르고 섬을 제대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난간 아래 바다 속 깊이를 헤아려본다. 바다에 가득한 산소를 들숨 깊숙이 마셔도 본다. ‘뚜우’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뱃고동소리가 가슴에 파고들어 공명한다.
   사막이 오아시스를 품듯 바다가 품은 섬 또한 신비한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상상을 해왔다. 해무海霧에 가린 몽환적인 섬 풍경을 수묵화나 사진작품에서 감상할 때면 그런 상상은 더욱 짙어졌다. 그리스 신화 이아손도 섬에서 황금 양가죽을 얻지 않았던가. 광맥이 보석을 품듯 섬은 섬이 되게 하는 숨겨진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끌림으로 섬에 간다.
   목적지에 배가 닿는다. 선착장이라야 달리 시설물은 없고 알땅에 경사진 시멘트 바닥이 전부다. 맞은편 해변 가까이 펜션인지 하얀 건물 두 채가 보이고 근처 구릉 아래 농가 대여섯 채가 납작 엎드려있다. 단걸음에 한 바퀴 돌 수 있을 것 같은 아담한 섬이다. 조금 전 내린 피서객 말고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한적하고 조용하다. 짐을 부리고 낚싯대를 챙긴다. 해변 도린 곁을 지나 파도에 부서져 내린 절개지 바위에 걸터앉는다. 낚싯대 드리운 지 한참 지나 땀으로 후줄근해진 후에야 수심에서 퍼덕퍼덕 신호가 전해온다. 반사적으로 줄을 챈다. 복어다. 등에 금빛을 띤 황복 새끼다. 놀란 때문인지 달걀 모양 빵빵하게 부풀린 녀석 모습이 귀엽다. 숭어가 크기로 월척을 자랑한다면 이 녀석은 희귀성으로 월척을 대신할 만하다.
   “그래, 낚싯대 값은 했수?”
   빈손 털레털레 돌아오는 나를 본 집사람. 사방이 바다인데 고기 한 마리 없더냐는 표정이다. 그런 그녀에게 금빛 복어 새끼 한 마리 낚았는데 녀석이 하도 똘망똘망해, 이야기 주고받다가 잘 살라고 제 곳으로 되돌려 보냈노라고, 그 녀석이야말로 월척이나 진배없는 피서의 보람이었다고 말을 꺼낼까 하다 그만 둔다.
   전설 속 황금 양가죽은 기대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섬을 떠올릴 때면 아련히 사려오는 것이 있다. 동경과 호기심이다. 간절히 기도하면 신을 만나듯, 섬의 참 모습을 발견하려 노력할 때 시인은 절창의 시를, 소설가는 한 권의 소설을 상재하지 않았던가. 실존하는 존재를 암시한 은유일 것이다. 황금복어를 보여주었던 것도 그런 뜻이 담겨있지 않을까.
   텅 비어 있었음에도 뭔가 가득한 것이 느껴졌던 섬. 그 섬이 멀어진다. 자줏빛 노을과 함께 땅거미에 묻힌다. 뱃머리 너머는 불빛 속에 끈적거리는 항구가 분주하고 자유롭게 그리고 마음껏 퍼덕거렸던 상상의 날개를 접는다.
   운전석에 앉는다. 숨 가쁜 섬 도시를 향해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박준수 님은 2010년 《계간수필》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