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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9년 1월호, 통권207호 I 지상에서 길 찾기] 해바라기 소녀 - 안영환

신아미디어 2019. 1. 29. 10:32

"해바라기 소녀는 인간의 심장을 ‘생명의 노爐’로 본 건데, 그것은 내게는 재생에 대한 계시啓示 같은 예언으로 다가왔다. 주위를 따뜻하게 하는 화로가 되라, 그 같은 계시는 꼭 성자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순진하디 순진한 아해兒孩를 통해서도 전해진다는 확신이 들었다."


 




   해바라기 소녀      -    안영환


   동짓달에, 8월에 피는 한 꽃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엉뚱하나 천진한 소녀가 있다. 나의 첫손녀인데 초등 3학년이다. 내년이면 4학년이 돼 더 어엿한 소녀티가 나게 될 것이다.
   어둡고 추워지는 초겨울에 살갗을 벗길 것 같은 강렬한 태양열이 온 누리에 가득한 8월을 보는 소녀는 “내 생일은 팔월 칠일/ 해바라기는 나의 생일 꽃”으로 시작되는 <해바라기>라는 자작시를 지어 할아비 휴대폰에 전송했다.
   어린것이 8월에 활짝 피는 꽃 중에서도 해바라기가 자기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메시지를 첫 구절에 도입하는 것이 청량음료처럼 상쾌한 맛을 낸다. 이 시를 읽으면서 “여보, 당신은 당신의 출생을 상징하는 꽃을 생각해 본적이 있소?” 하고 아내에게 물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다.


내 생일은 팔월 칠일
해바라기는 나의 생일 꽃
아름다운 노란색 꽃잎들
한가운데에는 검은색 씨들
검은 동무들은 동그랗게 모여서
뒹굴뒹굴 논다


나의 생일 꽃 해바라기
언제 봐도 태양을 닮은 아름다운 꽃
팔월의 하늘 아래서 춤추는 노란 꽃잎들
그리고 싱글벙글 신나 있는 검은 동무들
내년에 다시 만나자


   낙천적이고 발랄하게 자라는 아이이니 하루하루 해가 짧아지면서 음침음습해지는 계절이 싫을지도 모른다. 나의 첫손녀는 사계절 중에서도 한여름을 가장 좋아하는 건 아닐까. 아이들은 자기 생일이 봄이나 가을에 있는 걸 대체로 좋아한다는데 이 애는 여름 한가운데에 있는 걸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한번은 애에게 “더위 폭탄이 펑펑 터지는 팔월이 좋으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 장마가 갔지 않아요? 방학이구요, 방학이라니깐요! 하늘도 참 맑아지지 않아요, 그래서 해님의 얼굴을 언제나 볼 수 있구요, 해바라기는 해님의 얼굴을 보고 또 보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님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하늘엔 흰 뭉게구름이 둥둥 떠 가구요… 매미도 힘차게 울지 않아요? …강가에서 해바라기가 춤추는 팔월이 좋아요.” 한다.
   그러고 보니 애가 해바라기를 닮아 보이기도 한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머리통이 크고 목이 짤록한 게 키 작은 선플라워, 꼬마 해바라기의 이미지를 풍긴다.
   손녀는 과학시간에 뭘 배운 결과인지, ‘모든 생명의 원천은 태양’이라고 생각하는 듯싶다. 생명의 원천인 해님을 닮은 꽃 해바라기, 그 꽃은 해님을 바라보며 항상 웃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천둥번개와 함께 거센 돌풍에 실려 소나기가 무섭게 쏟아질 때는 고개를 떨군 채 떨면서 눈물을 쏟아낸다.
   내가 1년여 전 의료사고로 전신마취 상태에서 심장이 정지되었을 때, 이 소식을 접한 해바라기 소녀는 “할아버지 심장이 꺼졌다구요?” 하면서, 펑펑 울면서, 즉시 천주님께 기도하기를(엄마 뜻에 따라 천주교 세례 받음), “해님께 얼른 빨리 명령하셔서 할아버지 심장에 불을 다시 댕겨드리도록 해 주세요! 얼른 불을 다시 댕겨드리도록….” 했다고 한다. 기적적으로 내 심장이 꺼져버리지 않고 재발화된 건 손녀의 기도 때문일 수도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해바라기 소녀는 인간의 심장을 ‘생명의 노爐’로 본 건데, 그것은 내게는 재생에 대한 계시啓示 같은 예언으로 다가왔다. 주위를 따뜻하게 하는 화로가 되라, 그 같은 계시는 꼭 성자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순진하디 순진한 아해兒孩를 통해서도 전해진다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