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2월호, 통권206호 I 세상마주보기] 천복을 주셨나 봐요 - 조춘호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그래서 나를 부처 같은 얼굴로 만들어 놓으셨는지 모른다. 아마 그게 천복인 것 같다."
천복을 주셨나 봐요 - 조춘호
세종시문화원에서 열린 전국 ‘사랑의 일기’ 시상식에 참석하고 돌아올 때였다. 기차시간을 맞추려고 조치원역을 향해 급히 걷고 있는데 검정 옷을 입은 작달막한 젊은 여자가 오른쪽으로 착 따라 안겨 붙었다.
“덕을 많이 쌓으셨네요.”
뜬금 없는 소리가 가당찮기도 했고 왠지 섬뜩하니 무섭기도 했다. 따라 붙는 그녀를 떼어 놓기 위해 더 빨리 걸었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내 얼굴에는 인복이 가득하다며 쫓아왔다. 주문을 외는 마녀처럼 보였다. 어둑어둑해지던 때라 더욱 겁이 났다. 뛰다시피 걸으며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와, 못 쫓아오는구나.’
겨우 마음을 수습하며 안도하기도 잠시, 건널목 앞에서 어떤 젊은 남자가 나를 기다린 듯 또 내 곁에 바짝 다가왔다. 어디서인지 나왔다며 자기 신분을 밝히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 역시 내 얼굴에 인덕이 가득하다고, 공덕을 쌓은 얼굴이라고 극구 칭찬하며 말했다.
“복을 지으세요. 복을 많이 지으세요.”
“네. 알았어요. 차 시간 바빠요!”
뿌리치듯 말했다. 객지에서 낯모르는 남자와 얼굴을 바짝 대고 1:1로 상대한다는 것은 머리가 쭈뼛할 정도였다.
‘세종시 바닥에 왜 이런 젊은이가 많이 깔려 있담!’
드디어 신호등이 바뀌자 도망치듯 건넜다. 역에 다다라서야 휴우 하고 안도했다.
집에 돌아와 그 이야길 했더니 사이비 종교인일 것이라며 내가 어수룩하게 호구로 보이니까 그렇다고 했다. 언짢은 기분에 위로는커녕 설상가상이었다. 그러나 그랬을지도 몰랐다. 나는 지금까지 ‘야물딱지게’ 생겼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릴 적 별명 중에는 웃음이 헤퍼 ‘헤벌이’란 별명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 후 얼마 지나 고양시여성회관의 서예실에 가던 길이었다.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는데 세종시에서처럼 또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바짝 다가왔다. 생글거리며 친밀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참, 천복을 타고 나셨네요.”
내 얼굴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공을 들인 얼굴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남에게 베풀고 정성을 다해 인복을 나눠도 그 나누어 주는 만큼 대가가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 수행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듯 말했다.
‘수행불교인인가? 아니면 관상쟁이인가…?’
약간 긴장되긴 했지만 동네길이고 대낮이라 전처럼 공포감이 생기진 않았다. 가슴을 펴고 대꾸했다.
“수행을 하고 있는데요.”
반색을 하며 어디서 하느냐고 물었다. 자기들과 함께 하는 동지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교회서 하지요.”
의외의 대답인지 한 걸음 뒤로 주춤하듯 하다가 다시 생글거리며 말을 붙여왔다.
“몇 년이나 하셨어요?”
“65년이요.”
“와, 와~. 그럼 권사님이시겠네요.”
“그렇죠.”
그 청년은 눈을 크게 뜬 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마침 신호등이 바뀌었지만 따라오지도 않았다.
서예실에 도착해서 그 이야길 했더니 요즘 사이비종교에서는 남녀 젊은이들을 훈련시켜서 영업행위를 한다고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우선 멈춰 세우는 수법으로 첫 수순이 인복과 인덕이 있느니, 천복을 타고났느니 한다고 했다. 누구는 강원도 갔을 때, 누구는 청주 갔을 때 그곳에서도 따라 붙었다며 방방곡곡에 다 퍼져 있다고 했다. 사람을 호리는 말을 해서 어수룩한 사람들이 따라가면 제단을 차려 놓은 데로 데려간 후, 그다음 수순이 또 전개된다고 했다. 그 제단은 곧 돈 뜯어 내기가 목적이라고 이구동성이었다.
“난 수행불교인들의 포교활동인가 했어요.”
“아이 참 무슨 불교가 그러나요? 사이비 사기꾼 종교 아르바이트들이라니까요.”
매스컴에서도 나오는 것 못 봤냐며 인복, 천복, 공덕 그런 소리 좋아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이 내게 했던 말을 조금은 믿고 싶었다. 어린 시절, 어른들도 내 얼굴에 복이 붙었다고 했다. 특히 밥 복이 붙었다고 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그때, 식복이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복이었을 것이다. 또 대학생 때는 공주에서 서산으로 오는 버스의 남자 차장이 인덕 가득한 인상이 좋다면서 버스비를 받지 않은 일도 있었다. 교장시절에 함께 근무한 J 교감선생님도 그랬다.
“집에서 복잡하고 힘든 일도 학교에 와 교장선생님 얼굴만 보면 평안해져요.”
나는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도 나를 보면 편안해진단 말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이 듣고 지낸다. 잘해 준 것도 없이 거저 듣는 찬사라 민망하기도 하다.
어떤 선배님은 나를 만나면 이런 말까지 한다.
“조 교장을 보고 나면 사흘 동안 기분이 좋다니까.”
남편은 날더러 물에다 술 탔는지, 술에다 물 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만스럽게 탓할 때도 있는데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고양교육청 초등계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당시 장학사들은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어느 날 밤 10시가 넘자 다른 장학사들은 퇴근하고 인사담당 C 장학사와 나만 남았다. 당시 여러 가지 사건으로 교육청을 힘들게 했던 여교사가 있었다. 그녀의 민원처리로 법원에 소장 답변서를 쓰고 있던 C 장학사는 너무 힘이 들었던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두 팔을 들어 스트레칭을 했다. 피곤함을 달래려는 듯 어릴 적 이야기도 꺼냈다. 불교신자인 그는 어머님이 신실한 불교신자였다고 했다. 나도 거들었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팔봉산 절에 나를 팔고 불공드리러 가는 할머니를 쫓아 절에 올라간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는 깜짝 놀랐다.
특근해야 하는 일요일에도 주일예배 한 번 빼먹지 않는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알았던 내가 그러했다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곧바로 그가 하는 말이 더 놀라웠다.
“아! 그러고 보니 계장님 인상이 영락없는 부처님 상이에요.”
지도초등학교 교장 때였다. 여름 방학, 경기도 초등 여교장단이 연수 일정으로 충남서산 가야산 절벽에 있는 마애삼존불을 찾았다. 마애불磨崖佛이란 암벽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152기의 마애불이 전국에 산재해 있고 대부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서산 마애삼존불은 국보(제 84호)다. 국내 마애불 중 가장 미소가 아름다워 ‘백제의 미소’로도 알려져 있다. 층암절벽에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벙글벙글 웃고 있다. 우리 서산 사람들은 이 웃고 있는 마애삼존불을 바위에 새겨놓은 백제인의 예술혼이라며 해미읍성과 더불어 2경의 하나로 자랑스러워한다.
여교장들은 열심히 들여다보며 “어쩌면! 아, 온화하고 아름다운 이 미소!” 감탄일색이었다.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입을 모았다. 나는 여학교 때부터 이 마애불이 익숙해 있는 터에다 덥기도 해서 에어컨 있는 시원한 관광버스로 먼저 들어왔다. 한참 후에야 여교장들이 버스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공주교대 후배인 L 교장이 버스에 오르자마자, 앉아있는 나에게 환히 웃어가며 신기한 듯 소리쳤다.
“조 교장 선생님! 어쩌면 마애삼존불이 교장선생님을 꼭 닮았어요.”
“무슨 소리야?”
“정말예요. 틀림없이 똑같다니까요.”
내가 마애삼존불을 닮았다 해도 과분한 말인데 거꾸로 마애삼존불이 나를 닮았다니!
그러나 말 안 되는 소리를 후배는 되풀이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웃어주었다.
나의 얼굴상이 어떻게 보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며 살아왔을까?
내가 태어날 때는 동네에 교회가 없었다. 다만 팔봉산에는 조그만 절간이 있어서 그 절에 나를 팔고 보살을 수양어머니로 삼았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 절을 오르내리며 지성껏 나를 위한 기복 불공을 드렸다. 그런데 여섯 살 때, 동네 친구네 사랑방으로 외지에서 키가 아주 작은 할머니가 왔다. ‘전도할머니’라고 했다. 또래들과 그 방에 자주 놀러갔다. 거기서 성경이야기를 듣고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절에 올라가지 않았다. 내가 가지 않으니 어른들도 발을 끊었다. 그러나 절에 가서 빌었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지성에 감천하신 것일까.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그래서 나를 부처 같은 얼굴로 만들어 놓으셨는지 모른다.
아마 그게 천복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