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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5월호, 신작수필24인선 I 크리스티나 - 정충영

신아미디어 2019. 1. 18. 09:32

"수평선 너머 육지로 나간 나는 여전히 건너고 싶은 또 다른 수평선을 만나곤 했다. 오늘은 장엄한 석양에 물든 수평선 앞에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본다."

 

 

 

 

 

   크리스티나         /      정충영

 

   메마른 초원에 앉아있는 여인의 뒷모습이 나를 압도했다.
   아무도 없는 황갈색 마른 풀밭에 바람이 스쳐 가는지 그녀의 검은 머리칼은 흩날리고 풀잎도 살랑거린다. 저 멀리 지평선에는 잿빛 목조 농가 한 채가 서 있다. 어딘지 음산해 보이는 그 이층집은 전형적인 미국 시골집으로 가까이에 회색 판자 집인 헛간도 있다.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농가를 향해 비스듬히 기어가는 자세로 앉아 있다.
   한없이 적막한 풍경 속에 부각된 중년 여인은 핑크색 옷을 입어선지 얼핏 보면 아름답게 보인다. 비스듬히 앉은 불안한 자세와 땅을 짚고 있는 앙상하게 마른 두 팔을 들여다보노라면 어딘가 이상하다. 황량한 기운이 화폭 전면에 흐른다.
   아! 크리스티나.
   저 여인이 여기 있다니. 반가움과 경이감에 사로잡혀 나는 한참동안 그림을 바라보았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한 전시실 입구 벽면에 걸린 그림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내가 아직 30대이던 때, 도전적으로 청춘의 물살을 타고 있던 어느 날 그녀는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났었다. 선물로 받은 달력 그림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그 여인에겐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불시에 내 눈 앞에 등장한 그녀 이름이 크리스티나였구나.
   ‘소아마비로 다리 불구가 되어 육체적으로는 제약 받았으나 영혼은 결코 굴복하지 않던 여인’이란 해설이 붙은 그림.
   미국 현대화가 앤드류 와이어스Andrew Wyeth의 이웃인 크리스티나 올슨, 실제 인물이 주인공이다.
   휠체어를 타지 않고 그녀는 스스로 움직였다. 저 멀리 보이는 농가는 그녀의 집이다. 다리를 질질 끌며 기어서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뺨을 스치는 바람의 감촉과 향긋한 풀냄새를 즐겼다. 지평선 위의 집을 향해 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는 얼굴보다 더 많은 표현을 한다. 슬픔과 절망을 넘어선 불굴의 희망이 화가의 붓끝에서 섬세하게 묘사되어 인간 내면에 깃든 본질적 속성이 아프게 드러난다.


   이 그림과 비슷한 그림 한 장이 내 안에도 걸려 있다. 푸른 바다 저 멀리 수평선이 아득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그 해변 모래밭에 앉아 있는 내 피부에 맵싸한 해당화 향기가 스며들었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어린 내 모습은 한 폭의 그림으로 뇌리에 박혀 있다.
   “여기서 그냥 이렇게 살래?”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물었다. “싫어.” 옹달샘 가 밭두렁에 파랗게 돋아난 돌나물을 만지며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쟁으로 떠나온 서울이 그리웠다.
   간절하게 꿈꾼 대로 나는 수평선 너머 세상으로 나갔다.
   젊은 시절엔 왜 그 그림이 나를 사로잡는지 몰랐었다. 이제와 돌아보니 ‘크리스티나의 세계와’ 와 해변 모래밭에 앉은 소녀 그림이 비슷하다. 거기서 내 모습이 보인다.
   크리스티나는 실제로 죽을 때까지 존엄을 잃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며 그 집에서 살았다 한다. 요리를 하고 바느질을 하며 이웃 친구집이나 부모님 묘소에 갈 때도 휠체어를 타지 않고 불편한 다리로 다녔다. 어느 날 화실 창문 너머로 잔디밭을 기어가는 크리스티나를 목격한 화가는 감동했다.
   모든 사람들이 절망적이라 여기는 자신의 상황을 정복하는 그녀의 결연한 자세에서 화가 앤드류 와이어스는 아름다움을 본 것이다. 그녀를 위하여 환상적 사실주의magic realism기법으로 그녀와 그녀의 세계를 세밀하게 묘사해냈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로 제목을 붙인 이 그림은 위대한 명화로 평가받고 뉴욕 현대미술관에 상시 전시되고 있다.
   수평선 너머 육지로 나간 나는 여전히 건너고 싶은 또 다른 수평선을 만나곤 했다. 오늘은 장엄한 석양에 물든 수평선 앞에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본다.

 

 


정충영 님은 2009년 《한국산문》 등단. 제10회 한국산문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