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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2월호, 통권206호 I 사색의 창] 승무 - 이혜연

신아미디어 2019. 1. 16. 09:10

"내릴 곳을 놓칠까 염려가 되는 것일까, 아이는 여전히 두리번거리고 있다. 만일 내 짐작이 맞는 것이라면, 부디 제2의 종현이가 되지 않도록 현명하게 고비들을 넘어가기를…."







   승무      -    이혜연


   뜬금없는 일이었다, 그 아이의 뒤통수를 보자 조지훈의 시 <승무>의 한 구절이 떠오른 것은.
   서울로 가는 좌석버스 안. 한 청년이, 아니 소년이라 부르는 게 맞을 성싶은 앳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올라탔다. 손에는 바퀴 달린 작은 여행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는 바로 내 앞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스레 내 시선은 그의 뒤통수에 머물렀다. 깎은 밤처럼 단정하게 다듬은, 어디 한곳 꺼진 데 없이 둥글고 예쁜 머리통이었다.
   그는 금발에 가까운 갈색 염색 머리를 연신 매만지며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초조함일까 설렘일까, 하얗고 고운 옆얼굴에서 언뜻언뜻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고와서 서”럽다는 그 시 구절이 떠오른 것은.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아이돌 그룹 전성시대인 요즘, 여러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선발된 미소녀, 미소년들이 연예기획사의 조율에 의해 그룹으로 형성되어 K-POP을 이끌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그룹들은 그 명칭들이 외국어도 한국어도 아닌 합성어들이어서 나같이 어리바리한 늙은이는 기억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생김새들도 춤사위들도 엇비슷해서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도 수월치 않다. 그럼에도 예쁘고 생기발랄한 그들을 보면 요즘 아이들 말로 ‘안구정화眼球淨化’가 되는 듯 기분이 좋아진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공연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오곤 한다. 모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들이 적게는 2, 3년, 길게는 7, 8년 동안 연습생 생활, 즉 몸 고되고 수입도 없는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아니, 어쩌면 ‘종현’이라는 아이의 자살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인기 그룹 ‘샤이니’의 멤버였던 그의 죽음은 충격과 함께 “왜?”라는 물음을 남겼다. 그 물음에는 “잘나가고 있는데, 뭣이 부족해서….”라는 세속적 잣대가 함축되어 있었다.
   적지 않은 연예계 스타들이 공황장애 치료를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화려함 뒤에 도사리고 있는 외로움과 불안함. 그들을 외롭고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인기 부침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아닐까 싶다.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되어 있는 삶. “아이돌이 되면 보통의 일상을, 가족 친지와의 관계를 포기해야 한다.”는 어느 아이돌 그룹 매니저의 말은 스타로서의 계획된 모습과 본래 나의 모습과의 간극을 이겨내기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이면의 비애를 알 리 없는 젊은 아이들은 오늘도 화려한 무대, 자신에게 쏟아지는 환호와 열광, 팬심을 꿈꾸며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에 할애해야 하는 열악한 생활을 견뎌내고 있을 것이다.


…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별빛 환한 한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을 고이 접어 나비’처럼 쓰고 번뇌를 초월해보려 애쓰는 젊은 여승의 춤사위가, 불빛 휘황한 무대 위 현란한 아이돌 그룹의 군무에 오버랩 된다. 화려하고 열정적인 퍼포먼스에 감탄을 하면서도 어쩌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저 칼군무 뒤에는 연습 과정에서 겪었을 수많은 번민과 갈등이, 매혹적이고 강렬한 표정 이면에는 모호한 정체성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오늘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가는 아이는 그 생김새와, 고운 얼굴에서 흐르고 있는 설렘 반 초조함 반의 불안한 기운으로 해서 합숙 훈련을 위해 기획사를 찾아가고 있는 아이돌 지망생이 아닐까 추측게 했고, 그 추측은 잠시 나를 엉뚱한 상념에 빠지게 했다.
   내릴 곳을 놓칠까 염려가 되는 것일까, 아이는 여전히 두리번거리고 있다. 만일 내 짐작이 맞는 것이라면, 부디 제2의 종현이가 되지 않도록 현명하게 고비들을 넘어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