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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2월호, 통권206호 I 사색의 창] 선유구곡 너럭바위 - 신노우

신아미디어 2019. 1. 14. 09:03

"시간을 거슬러 선유구곡 너럭바위에 선비들이 학처럼 둘러앉았다. 운韻을 달고 한시를 한 소절씩 지어간다. 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완성된 한시를 읊조리고 고개를 젖히며 한바탕 호탕하게 웃는다. 그 모습이 아른아른 아지랑이 되어 피어오른다. 역시 산은 산이어서 좋고, 구곡에는 너럭바위가 있어 세상이 넓어 보인다."







   선유구곡 너럭바위      -    신노우


   오월, 푸르른 날에 문학기행을 떠났다. 문인협회에서는 매년 문학기행을 테마를 정해서 간다. 지난해는 곳곳의 문학관을 돌아보았는데, 올해는 구곡원림 탐방이다.
   원하는 탐방 장소를 선택하라고 했다. 성주 무흘구곡, 청도 운문구곡, 경주 옥산구곡, 영천 횡계구곡, 문경 선유구곡, 봉화 춘양구곡이 공지되었다. 다른 곳은 2년간 문화해설 강좌를 들으며 현장 답사로 가본 곳이고, 문경 선유구곡만 생소해서 선택했다. 국내에 100여 곳의 구곡이 있다고 한다. 선유구곡은 어떤 곳일까?
   대야산의 동쪽인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내선유동이 있고, 서쪽에는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에 외선유동이 있다.
   문경 내선유동 계곡은 넓은 너럭바위와 속살이 훤히 보이는 맑은 물이 흐르고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9곡이라 이름 붙은 곳이 있다. 모두 바위에 옥석대玉潟臺, 난생뢰鸞笙瀨, 영귀암詠歸巖, 탁청대濯淸臺, 관란담觀瀾潭, 세심대洗心臺, 활청담活淸潭, 영사석靈槎石, 옥하대玉河臺라 새겨 놓았다.
   선유동은 선유구곡이 있는 옥석대를 말한다. 계곡 왼쪽에 도암陶庵 이재李縡 선생을 기리는 학천정鶴泉亭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도암 이재 선생은 대야산 용추龍湫 부근에 둔산정사屯山精舍를 세우고 후학을 교육시켰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고 말았다. 그 후에 향내에 사람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이 정자를 새로 세울 때 선유구곡 제9곡에 학천정을 세웠다. 학천정 앞 평평한 바위에는 ‘옥석대玉舃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물이 맑고 풍광이 빼어나 많은 사람이 여름철에 물놀이하는 곳이다.
   나도 발걸음을 멈추고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었다. 말간 물 바닥이 나를 쳐다본다. 발을 담그려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투명한 물을 바라보노라니 자꾸만 담가보라고 유혹한다. 못 이기는 척 슬며시 후끈한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갔다. 시리도록 시원함이 몸 구석구석 세포가 살아나는 듯했다. 고개를 들자, 계곡 오른쪽에 솟아 있는 바위에 ‘선유동仙遊洞’이라는 글귀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최치원 선생이 쓴 글씨라고 전한다.
   내선유동 계곡은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계곡으로 아기자기한 계곡미와 기암괴석들의 절경을 품고 있다. 선비들이 시서를 논하며 풍류를 즐겼던 여유로운 삶을 엿볼 수 있다. 계곡의 골이 깊고 넓어 물흐름이 완만하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고 풍부한 물줄기가 기암괴석을 간질이며 유연하게 굽이쳐 돌면서 못을 이루고 소를 만들었다.
   물가에는 비비추, 참나리, 초롱꽃, 진달래, 복사꽃, 배롱나무가 물그림자를 지우며 어우러져 계절 따라 피고 지니 진정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닐까? 그 시절 선비들이 이런 자연과 더불어 요산요수樂山樂水하며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즐기던 멋스러운 정취가 그립다. 보는 이가 없다면 옥색 물에 풍덩 뛰어들어 도심에서 찌든 마음을 훌훌 씻고 싶다.
   둔덕산과 대야산에서 발원한 선유동천 청정물길은 선유구곡을 이뤘는데, 1~9곡까지 계곡 바닥이 온통 하얀 너럭바위이다. 너럭바위 위를 흐르는 물길을 보며 세속의 떼를 지웠는가. 외재 정태진畏齋 丁泰鎭이 그중 아홉 굽이에 이름을 붙여 시를 지었다. 선유구곡시仙遊九曲詩다. 구곡마다 한시 현판을 세워놓았다.

 
‣ 서시序詩
十載經營此一遊 십 년을 살다가 이렇게 한 번 노니니
洞門深處興悠悠 선유 동문 깊은 곳에 흥취 가득하다.
淸溪曲曲靈源瀉 맑은 시내 굽이굽이 원두에서 흘러오고
老石磷磷積翠浮 늙은 돌은 울툭불툭 푸른빛이 떠돈다.
曠世蒼茫追隱跡 선인은 아득하니 숨은 자취 따라가며
幾時粧點獲勝籌 몇 번이나 자리 잡고 좋은 계책 얻었는가.
金丹歲暮無消息 금단은 한 해가 다하도록 소식 없으니
羞向人間歎白頭 부끄러이 세상에서 백발을 탄식하네.

   시간을 거슬러 선유구곡 너럭바위에 선비들이 학처럼 둘러앉았다. 운韻을 달고 한시를 한 소절씩 지어간다. 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완성된 한시를 읊조리고 고개를 젖히며 한바탕 호탕하게 웃는다. 그 모습이 아른아른 아지랑이 되어 피어오른다. 역시 산은 산이어서 좋고, 구곡에는 너럭바위가 있어 세상이 넓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