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4월호, 신작수필24인선 I 쌍칼파 - 최승영
"나의 쌍칼파가 가스 불처럼 그 음식의 생소함을 푹 익혀 줄 것이기 때문이다. 더는 돌과 함께 춤추다 내장부터 쏟아지는 달걀 신세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아차, 경솔했구나. 쌍칼파는 입 밖에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내면에 간직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쌍칼파 / 최승영
“저는 원래 비위가 약해서 집을 떠나면 음식을 잘 못 먹고 변비도 생기고 해서 불편을 겪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 불편한 습관을 없애고자 마음먹고 그것을 쌍칼파로 정했습니다. 여행 동안 저는 쌍칼파를 이룬 것 같습니다. 모든 음식도 잘 먹었고, 배탈이 나지 않았고, 화장실 가는 문제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어느 소설가의 《심리 에세이》에 실린 글이다. 대학원생으로 짐작되는 화자는 유난히 조용하고 눈이 빛나는 여성이다. 인도 여행 중에 아무도 먹지 못하는 음식을 묵묵히 먹는 모습이 작가의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어떤 성찰을 목적으로 하는 요가 여행이어서 다른 학생들이 내놓는 쌍칼파는 대부분 업장소멸, 에고리스ego-less 등 형이상학적 내용이어서 달리 도드라져 보였던 모양이다.
무슨 조직의 명칭 같은 쌍칼파라는 용어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자신도 몰랐던 작가가 인솔 지도교수에서 물어서 얻은 개념은 ‘원을 세운다’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승의 화두보다 난해해서 흡사 단애의 바닥에 주저앉아 아득한 위를 올려다보는 느낌이었다. 머리를 흔들어 정돈하고 인터넷을 뒤져봤다. 쌍칼파는 인도의 고대 산스크리트어라면서 요가니드라(수면요가), 즉 의식적으로 잠을 조절하는 요가 행법 중에 수행자 각자가 정하는 내면 자아의 다짐 혹은 결심을 뜻한다고 한다. 막연하게나마 쌍칼파의 형체 같은 건 보았지만, 원을 세운다는 의미는 여전히 요연한 곳에 있는 듯했다.
원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도형이다. 내가 선생이었을 때, 교실 환경구성물은 거의 원형이었다. 그 안에 교육적 사진과 설명을 붙이고 삽화를 그려 넣었다. 왜 원이 좋은지는 딱히 설명할 길은 없다. 시원과 끝을 알 수 없는 그냥 이음매 없이 둥글게 흐르는 그 영속성이 좋은지도 모른다. 펼치면 직선이 되고 그걸 말아 붙이면 다시 돌아가는 유연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원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특성은 많다. 시각적 심미적 기능적 호감을 준다. 어느 방향으로 봐도 크기가 달라도 모양은 같고, 중심에서 원주의 어디든 닿는 길이가 같아서 형태적으로 완전성을 갖췄다. 굴렁쇠처럼 굴려도 팽이처럼 돌려도 에너지를 잃지 않는 한 균형성을 잃지 않는다. 지면과 마찰하는 원주의 노동량은 어디든 같게 공정성을 유지한다. 위아래도 없고 계급과 계층도 없는, 평등성을 추구한다. 꼭짓점이 없는 유일한 평면도형으로 부드럽고 여성적이고 친근하여 안정성이 있다. 외부의 압력에 저항하는 내부의 힘은 원주의 어디에서든 정일하게 작용하여 그 원형을 보존하는 영원성을 지녔다.
나름으로 원을 해부하여 원을 세운다는 의미를 추적해 봤지만, 여기서의 원은 도형이 아닌 모양이다. 아니라면 ‘무엇을 바란다’,는 원願은 아닐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원에 대한 19개의 뜻풀이가 있다. 그 중 그게 쌍칼파의 의미에 가장 관련 있는 풀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던 한 친구가 아들자식을 두고 푸념했다. 공무원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아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물심으로 뒷바라지 했을 그는 치밀어 오른 화를 다른 가족에게 풀었던 모양이다. 막걸리 한 잔을 벌컥 다 들이키는 그에게 나는 말했다. 아들의 낙방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네 분노는 네 자신의 감정으로 존재할 뿐이다. 서로 별개라는 말이다. 네 분노를 아들이나 가족에게 투사한들 상황만 악화될 게 뻔하다. 이중인격이라고 몰아붙이지야 않겠지만 누구나 내가 이론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인간임은 짐작할 것이다. 코웃음을 지을 것까지는 없다, 일치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어야 말이지. 내친김에 나는 그에게 쌍칼파 하나를 권했다, ‘저 나이 때는 나도 그랬지 뭐, 더 했으면 더 했지!’ 미리 하는 말이지만 술자리를 파한 후에 그는 족발 한팩을 포장해 달래서 들고 갔다. 저처럼 술 잘 마시는 낙방한 아들에게 주겠다면서.
함께 묵묵히 술만 마시던 후배의 눈자위가 갑자기 붉어졌다. 그의 탄식이 섞인 얘기를 듣노라니 덩달아 내 눈자위의 실핏줄도 어떤 압력을 받는 듯했다. 뭔가 어색한 어법이긴 하지만, 나는 그의 눈물이 고마웠던 것이다. 평소 헌걸차던 그의 페르소나 저 안쪽에 숨은 다른 그를 본 듯도 했기 때문이다. 새로 본 그는 여리고 섬세했다. 남자들은 대개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기를 꺼린다. 드러낸다는 건 징징거린다는 것이다. 미성숙하다고 생각한다. 강인하게 보이는 페르소나로 위장한다. 그걸 벗고 내면을 드러내는 행위는 자신의 불안한 감정이 밀봉된 콘크리트를 한순간만이라도 해체한다는 선언일 수도 있다. 조야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세다.
후배는 수차례 주식을 사 큰 손해를 봤다. 용서를 빈 그에게 그의 아내는 말했다, 용서는 무슨, 우리 그거 없어도 잘 살 수 있으니 걱정 말아요. 돈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편의 행동과 그를 향한 아내의 분노의 감정은 개별로 존재한다. 이 분명한 상황을 헝클어놓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오히려 ‘우리 그거 없어도 잘살 수 있’는 가정이 해체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상황과 감정을 차갑지 않고 따뜻하게 분리했다. 이런 슬기야말로 평생 갈고닦은 그녀의 쌍칼파가 이뤄낸 성과가 아닐까. 어쩌면 그녀는 원을 닮고 싶어, 원을 세웠는지도 모르겠다.
몇 번의 아시아 여행에 나는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낭비했다. 생소한 음식을 먹을 수 없어 기진맥진했으니 낭비가 아니고 무엇이었으랴. 내키지는 않지만 머지않아 태항산을 가게 됐다. 나는 앞서 소개한 대학원생의 쌍칼파를 차용해 나의 쌍칼파를 이뤄볼 요량이다. 이번에는 내가 그 향내 지독한 중국음식을 야무지게 씹어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쌍칼파가 가스 불처럼 그 음식의 생소함을 푹 익혀 줄 것이기 때문이다. 더는 돌과 함께 춤추다 내장부터 쏟아지는 달걀 신세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아차, 경솔했구나. 쌍칼파는 입 밖에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내면에 간직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최승영 님은 수필가. 2013 《에세이문학》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