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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2월호, 통권206호 I 지상에서 길찾기] 남 몰래 흘리는 눈물 - 이양주

신아미디어 2019. 1. 9. 10:08

"나는 살아오면서 진 눈물 빚이 많다. 지나온 내 슬픔 속에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아름다움도 들어있었다. 그것을 깨닫게 해 준 건 내 눈물과 함께 해 준 고마운 존재들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슬픔을 견뎌내고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나도 다른 이의 눈물과 함께하고 싶다. 그것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내 삶의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슬픔에서 벗어나지 않으련다. 나는 내 슬픔의 촉수가 둔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남 몰래 흘리는 눈물     -    이양주


  슬픔도 공空이다
   내가 본 건 공空의 실체인가. 내 나이 열여섯. 화장장 굴뚝의 연기가 되어 사라져버린 내 인생의 절대적인 어머니라는 색色. 불길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그날 입은 화인은 내가 색에 집착할 때마다 나 또한 공이라며, ‘나를 없애라’고 되살아나곤 한다. 보이는 것들의 실체는 애초부터 없었다. 연기緣起에 의해 일어난 착시현상일 뿐. 나는 색色보다 공空을 확신한다. 그런데 내 밑바닥에 늘 깔려있는, 끝나지 않는 이 슬픔은 뭘까.


  슬픔이 우리를 이어주더라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시간, 몰래 빠져나와 빈 교실에 찾아들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교실엔 어둠만 남아있었다. 혼자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혼자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지독한 외로움이 나를 에워쌌다. 눈물이 아니고는 달리 견딜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람을 보아도 풀꽃을 보아도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죽음과 한 몸으로 보였다. 생시에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어머니는 슬픔의 한가운데에 나를 혼자 두고 가셨다. 삶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얻지 않고는 빠져나올 수 없는 슬픔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앞에 나는 슬픔이 습관이 되어버렸고, 혼자 있을 때면 그리움과 외로움에 울곤 했다.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내 등 뒤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돌아보니 한 친구가 울고 있다. 자리를 비운 내가 걱정되어 찾아 나왔다가 내 눈물과 함께 한 것이다. 내가 우는데, 내가 울어서, 친구도 따라 울었다. 나 때문에. 나를 위해서 울어 주는 친구로 하여 눈물이 멈추었다.
   슬픔이 우리를 이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슬픔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다. 내 슬픔을 들켜버린 그날 이후로 우린 평생을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다.

  소쩍새 슬피 울어
   잠결에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깨어 보니 친구가 방 한구석 어둠 속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울고 있었다. 놀라서 연유를 물었더니 내가 우는 소리에 깨어났다는 것이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꿈결에 들은 소쩍새 울음소리다. 내 베갯잇이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소쩍새가 잠든 내 슬픔을 깨워 잠결에 울게 했나 보다. 남들 다 잠든 밤에 홀로 지새며 온 산이 울리도록 울고 있는 소쩍새. 얼마나 삼킬 수도 다 뱉을 수도 없는 쓰라린 슬픔이기에 저리 목이 쉬도록 울어대는가. 나는 살면서 그렇게 서러운 울음소리는 처음 들었다.
   잠이 깬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결혼 후 친구의 가슴속에는 묻어두었던 아픔이 참으로 많았다. 친구의 슬픔 앞에 눈물이 흐른다. 우리는 서로 눈물을 보태었지만, 가슴 한편이 서늘하면서도 따뜻해졌다. 친구와 나는 나란히 누워 손을 꼭 잡고 잠을 청했다. 창밖엔 지다 만 달이 소쩍새의 심정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매달려 있다. 소쩍새도 슬픔을 내려놓으면 좋으련만. 곧 새벽이 밝아 오리라.


  슬픔의 묘약
   우리는 이미 근원적인 슬픔을 지니고 태어났다. 깨달으면 슬픔이 사라질까. 이 세상에 슬픔이 없다면 신의 존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신은 깨닫기 전에도 깨달은 후에도 스스로 슬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세상은 슬픔 천지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나는 슬프다. 당신도 슬프다. 세상도 연일 슬픔을 토로한다. 다들 외상보다 내상이 많은 상처를 안고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서 운다. 그나마 우리의 슬픔의 얼굴은 닮은 면이 많아 서로 알아챌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마도 이 세상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지켜보며 작별을 고하는 것은 슬픔일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진 눈물 빚이 많다. 지나온 내 슬픔 속에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아름다움도 들어있었다. 그것을 깨닫게 해 준 건 내 눈물과 함께 해 준 고마운 존재들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슬픔을 견뎌내고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나도 다른 이의 눈물과 함께하고 싶다. 그것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내 삶의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슬픔에서 벗어나지 않으련다. 나는 내 슬픔의 촉수가 둔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노르웨이의 팝 가수 얀 웨르너 다이엘센이 부르는 <In Our Tears>가 흐르고 있다.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에 나오는 아리아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을 재해석한 곡이다. 가슴을 저미는 듯한 애절한 선율에도, 쓸쓸한 목소리에도, 슬픔을 치유하는 묘약이 들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치유한다고 했던가. 슬픔의 묘약은 사랑이다. 다이엘센의 목소리가 가슴에 젖어 든다.
   ‘나의 이름을 불러요. 우리가 어둠 속에 있는 당신을 찾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