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4월호, 신작수필24인선 I 종달새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 박성실
"갑작스레 유튜브에서 보게 된 L과 후배, 멀리 날아가 버린 줄 알았던 종달새가 지저귀며 어릴 적 우리가 함께 즐겨 부르던 노래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오호! 종달새, 높은 하늘에 너 올라가 무엇을 노래해. 하늘의 은혜, 땅 위의 영광 찬양하며 노래 부른다…노래 부른다.’ 온종일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도 종달새가 된 날이었다."
종달새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 박성실
12월 초인데 겨울이 성큼 내려앉은 날이었다. 케냐 ‘지라니합창단’이 해외순회공연 중 우리 교회를 찾아왔다. 예배당은 예제서 몰려든 관객으로 꽉 차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원색의 아프리카 민속의상을 입은 아이들이 노래를 시작했다. 점보, 두루 춤을 춰요, … 당신을 축복해요, 아리랑…, 신나는 노래와 율동으로 공연의 열기가 더하는 가운데 영상이 흘렀다.
케냐 단도라지역 고로고쵸 마을의 쓰레기 더미 위에 앉아 있는 어린이들. 구호활동을 위해 그 지역을 찾았던 한국인 선교사는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단다. 하나둘씩 데려다 도레미조차 모르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자 어느새 초점 잃었던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지며 웃고 있었다고. 날로 자존감이 높아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이로비 국립극장에서 창단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해외 공연에 나섰다는 것. 기금을 모아 지역의 어린이를 위한 교육사업을 할 수 있게 된 합창단은 ‘지라니 좋은 이웃’이 되었다고 했다. 단장은 아이들의 배고픔을 달래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이 노래를 하면서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 나갈 자신감과 능력을 키우고, 서로 믿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는 이야기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손뼉치며 ‘하쿠나 마타타 잘될 거야’를 열창했다. 쓰레기더미를 뒤지던 아이들이 넘치는 자신감으로 밝게 노래하는 모습에 우리도 박수와 환호로 응원해 주었다. 뜨겁게 뜨겁게. 돌아오는 길, 겨울밤의 차가운 바람에도 가슴은 마냥 훈훈했다.
기차역 뒤쪽에 일자리를 구해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 양지바른 구릉에 기대어 앉은 동네엔 피난민들도 살았고 큰길가엔 기와집도 줄지어 있었다. 우리 가족이 다니던 언덕 위의 자그마한 예배당. 어느 날, 노래를 가르쳐주겠다는 선생님이 나타났다. 초등학교 3학년인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함께 호흡과 발성을 배우고, 새로운 노래를 익혀 부르는 일은 신나는 놀이였다. 고향이 황해도라는 선생님, 낮엔 일하고 뒤늦게 야간고등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외모가 말쑥하고 목소리도 맑았다. 소프라노 멜로디를 부르실 땐 정말 여자 목소리 같아서 정신이 쏙 빼앗길 정도였으니. 삐걱거리는 풍금반주에 맞춰서 찬송가는 물론 가곡, 외국 민요를 배웠다. ‘생명의 양식’, ‘스와니강’의 화음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종달새’를 부를 땐 입 모양과 눈동자도 동그랗게 되고 날갯짓하며 드높은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 되곤 했다.
첫 발표회를 하던 날엔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것처럼 작은 예배당이 꽉 찼다. 어른들은 바람이 휘몰아치던 마을 골목마다 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다며 대견해 하셨다. 그 후 거듭 합창대회에서 상을 받으며 K 방송국에 출연도 하게 되었다. 조퇴하고 교실 밖으로 나서던 날은 어찌나 으쓱했던지. 선생님과 친구들의 박수까지 받았으니…. 음성이 굵어진 개구쟁이 남자애들은 중도에 합창단을 그만두어야 했지만, 음색에 큰 변화가 없던 우리는 한동안 더 할 수 있었다. 진학 후 이사하게 되어 합창단을 떠났어도 오랜 인연으로 이어진 L과 요즘도 종종 노래하던 이야기를 하며 추억 여행을 한다.
눈부시게 흰 치아를 드러낸 채 해맑게 웃고 노래하는 ‘지라니’를 보며 나는 마치 종달새처럼 노래 부르던 시절의 아릿한 추억에 잠겼다.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도 밝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노래한 우리들과 미처 피우지 못한 음악에 대한 열정을 어린이들과 함께 풀어냈던 선생님. 우리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며 여리게 세게, 짧게 길게, 점점 크게 점점 작게…, 다른 소리에 귀 기울여 듣고, 입을 오므렸다 벌렸다 하며 화음을 만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소리를 모아서.
그분은 단순히 오선 위의 음과 리듬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너희들은 잘할 수 있어, 선생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노래하며 자라는 동안 기차역 앞 동네 애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고, 미래를 꿈꾸며 희망의 길을 찾았다. 노랫말을 음미하면서 생각이 자라고 감성은 깊어졌다. 그 과정은 삶의 지혜를 배우고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뒤늦은 깨달음이었지만. 높고 낮은 음과 리듬과 진동으로 만들어지는 노래. 완전한 조화를 이룬 소리가 사람의 감정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사람과 사회를 변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된다는 사실. 노래의 씨앗 한 알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생명력은 얼마나 놀라운가.
어느 날 L이 카톡에 동영상을 보내왔다. 유튜브에서 그니 부부가 함께하는 합창이 울려 퍼진다. ‘금빛나는 밝은 별, 은빛나는 밝은 달… 다 주를 노래하라.’ 웅장한 화음이 가슴 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들었다. 오랜만에 합창의 진수를 맛보게 해주니 더없이 고마웠다. 유튜브를 닫으려는 순간 바로 아래에 있는 동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춤추는 지휘봉을 따라서 경쾌한 선율이 흐른다. 합창단 소개 자막에서 지휘자 이름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귀밑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의 지휘자는 바로 귀여웠던 꼬마 후배가 아닌가. 음악성이 뛰어남, 가정형편이 어려움, 공고진학, 취업, 등록금 마련해서 음대 진학, 미국으로 유학. 조각조각 흩어졌던 희미한 기억들이 퍼즐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다시금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갑작스레 유튜브에서 보게 된 L과 후배, 멀리 날아가 버린 줄 알았던 종달새가 지저귀며 어릴 적 우리가 함께 즐겨 부르던 노래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오호! 종달새, 높은 하늘에 너 올라가 무엇을 노래해. 하늘의 은혜, 땅 위의 영광 찬양하며 노래 부른다…노래 부른다.’ 온종일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도 종달새가 된 날이었다.
박성실 님은 수필가. 《좋은수필》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