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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1월호, 통권205호 I 세상 마주보기] 줄행랑 - 박순자

신아미디어 2018. 12. 31. 16:26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 연인처럼 잡은 G의 손은 차갑지만 가슴 따뜻해진 하루다. 여름의 시작인 싱그러운 숲길 사이로 남해의 일몰이 길게 내린다."







   줄행랑     -    박순자


   화창한 일요일, 전화벨이 울린다.
   “햇살 좋은데 줄행랑칩시다. 잠깐 머리 좀 식히고….”
   며칠째 우울한 기분을 눈치챘는지 해 질 무렵까지 돌아올 수 있는 가까운 곳으로 갔다 오자고 G가 솔깃한 제안을 한다.
   우리는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달렸고, 일단 집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수다 삼매경은 어느새 삼천포−창선연륙교를 건넜다.
   남해금산 보리암, 입구에서 길이 막혔다. 초파일 가까운 휴일이라 자동차 행렬이 줄을 서 되돌아 나왔다. 어디로 갈까.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닷가로 길게 난 길과 우거진 숲을 향해 가보자고 했다.
   바닷가 몽돌 구르는 소리가 꾀꼬리 우는 것 같다고 붙여진 ‘앵강’ 어쩌면 와 본 듯한, 그렇지만 처음인 그곳은 이름도 낯선 앵강다숲이었다. 바다와 볕살과 바람은 우리 편이었다.
   오랫동안 군부대가 있던 곳이라 숲은 잘 가꾸어졌다. 늙은 후박나무에서 흩날리던 꽃향기는 온 숲을 감싸고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다정한 연인처럼 말없이 걷기만 해도 좋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태풍에 가지가 부러져 상처가 거뭇한 등 굽은 소나무 아래에 섰다. 삐딱하게 서서 키 키우는 소나무가지는 한 번 상처가 난 게 아니다. 여러 번 부러지고, 아물고 또 아문 흉터에서 점액질이 흘러나와 검게 굳어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보듬고 안으로 견뎌온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상처투성인 덩치 큰 소나무를 바라보며 G가 말했다.
   “괜찮지요?”
   “묻지 마세요. 안 괜찮아요. 힘내라고 하지도 마세요. 버티는 중이니까.”
   퉁명스럽게 답을 하고 보니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마음에 다른 상처를 덧입히고 있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순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꾹 눌러왔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가슴앓이들을 쏟아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존감을 다쳤는데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감정조절을 하자니 억울하다고. 화를 내면 당장은 속이 시원하겠지만 같은 사람이 될 것 같아 대꾸 한마디 못한 것이 속상하다고. 오래전에 섭섭했던 일까지 떠올라 괴롭다고. 잊으려 애쓰면 더 선명해지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다고. 칼끝에 벤 상처만 상처가 아니고 말에도 깊게 상처가 났다며 주절주절 속앓이를 꺼내고 있었다. 잠시 묵묵하게 말을 들어주던 G가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부딪침으로 인하여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적당한 상처는 자신을 성숙하게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다른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너무 몰아가지 마라. 살면서 긁히고 부딪치고 겪는 아픔은 누군들 없겠는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상처는 아물고 무뎌질 것이다. 그때쯤이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니 모래 위 발자국 지우듯이 잊어버리라. 상처 준 사람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데 당신 혼자 아파하지 마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흔하게 해주었던 말이었고 흔하게 들어왔던 말인데도 고개 끄덕인다. 꽉 막혀 요지부동이던 답답함이 풀어지고 가슴속 응어리가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상대에게 할 수 있다. 나 역시 생각 없이 쉽게 내뱉은 말에 누군가도 아파했을지 모른다. 말이 아닌 크고 작은 돌이 되어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어땠을까? 한번 되돌아보고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들은 다양하겠지만 무작정 줄행랑치자는 G의 제안으로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내는 연습과 나를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많이 속상하고 섭섭하던 것들을 풀어내어 소나무 밑에 묻어놓고 발걸음 가볍게 돌아섰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 연인처럼 잡은 G의 손은 차갑지만 가슴 따뜻해진 하루다. 여름의 시작인 싱그러운 숲길 사이로 남해의 일몰이 길게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