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4월호, 신작수필24인선 I 교사극단 상황狀況의 편린片鱗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고춘高椿
"40대 초반이던 ‘상황시대’를 되돌아보며 감개무량하기로, 그 편린만 몇 자 적었다."
교사극단 상황狀況의 편린片鱗 / 고춘高椿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75년 가을, 군사쿠데타와 유신독재의 수괴 박정희朴正熙가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기 정확히 4년 전 가을이었다.
서울의 몇몇 의식 있는 교사들이 마포강가의 우리 집에 모였다. 박정희 정권의 갖가지 반민주적 행태에 저항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목적이었다.
암암리에 마음을 주고받던 열댓 명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마치 쇳가루가 자석에 빨려들듯 반골교사 수괴 ‘이재오李在五’의 인력권引力圈 안에 들어와 반유신의 기치를 든 것이다.
서슬 퍼런 계엄령-위수령-긴급조치 등 반민주적 상황의 벽에 구멍을 내서 민주주의의 마중물을 끊임없이 부어나가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극단을 창단키로 뜻을 모았다. 유신의 패악을 짓부수고 지식인들이 열어가야 할 진로를 무대 위에서 연극이라는 픽션Fiction을 통해 발설해가자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멀쩡한 사람들이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명목 하에 영장도 없이 체포 구금되어 비상 군법회의에서 처벌을 받아야만 하는 현실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행동에 나서자는 데에 이의는 없었다.
당시 서대문구 갈현동 소재 대성고등학교 국어교사 ‘이재오’라는 인물은 거의 좌익에 가까운 진보지식인이었다. 그가 극단의 이름을 시대성을 살려 ‘상황狀況’이라 짓고 자신이 연출을 담당하는 일방, 나에겐 나이를 감안했음인지 ‘대표’라는 직함을 주었다. 나이 덕에 극단의 대표가 된 나는 창단의식을 한강이 바로 눈 아래 굽어보이는 마포동 405번지 우리 집에서 치렀다. 제법 기품이 넘치는 멋진 한옥의 강 쪽에 면한-여닫이 창문이 두 쌍이나 나란히 달린 길쭉하고 커다란 방에서, 마포대교 밑을 도도히 흐르는 한강물을 굽어보며 열댓 명 반골들이 엄숙한 창단의식을 치렀다. ‘고춘, 이재오, 임기묵, 김명곤, 김광휘, 박상인, 김정자, 변규백, 방덕영, 신정숙, 이금림, 정민웅, 장미경, 정요일, 윤강, 조항용’ 등이다. 그때 우리는 ‘유비’를 비롯한 ‘관우’ ‘장비’ 등 3형제가 유비의 집에서 ‘도원결의’하듯, 그런 숙연하고 엄중한 마음이었다.
3년 반 동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소작의 땅’ ‘아벨만 이야기’ ‘뻐꾹 뻐 뻐꾹’ 등 네 편의 작품을, 1년에 한 편씩 시민회관 별관과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던 중, ‘남민전’ 활동을 하다 수사당국에 연행된 사람들이 있어 공연은 일단 중단되고, ‘상황’의 역사는 4년 만에 사실상 막을 내린 것이다. 연출담당 ‘이재오’, 연출기획 ‘임기묵’이 남민전 관련 반골들이었다.
그런 이재오가 석방 뒤 어찌된 영문인지 180˚ 사상전향하여, 뒷날 대통령이 된 ‘이명박’과 손잡고 정치에 몸담아 ‘이명박 정부’의 제 2인자가 됐다. 4선의원에 특임장관까지 지냈으니 원, 세상에! 모를 건 사람 마음이라더니!
연예계의 실력자요 공연마다 거의 주연이었던 김명곤은 이재오보다도 먼저 정계에 발을 들여놓더니, 정치적으로 이명박과는 대척점에 있던 노무현정부에 참여하여 국립극장장을 거쳐 문화관광부장관이 됐고, 여류작가 이금림은 KBS의 지정 드라마 작가가 되기도 했다.
제1회 공연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주연배우는 신길동 소재 장훈고 교사 ‘박 상인’이고, 주제곡은 당시 대성고등학교 음악선생 ‘변 규백’이 작곡했는데, 폭발적 인기곡이 돼서 뒷날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됐다. 40년 전 그리운 그때를 회상하며 어디 그 노래 다시 한 번 불러볼까.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 따라 꿈속을 가듯
정처 없이 걸어가네. 걸어만 간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울린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 걸어 봄 신명이
가슴에도 지폈네.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네. 보고만 싶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40대 초반이던 ‘상황시대’를 되돌아보며 감개무량하기로, 그 편린만 몇 자 적었다.
고춘 님은 수필가. 《좋은수필》로 등단. 수필집: 『고춘산고』, 『억이야 떡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