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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3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눈인사 - 장병선

신아미디어 2018. 12. 25. 23:53

"퇴근길에 손전화를 아예 가방 깊숙이 넣는다. 오가는 이의 얼굴을 읽는다. 행여 아침에 본 그 여인이 걸어올까. 낯익은 얼굴이 또 눈에 띌까? 지금부터 ‘낯익은 이가 보이면 미소 띤 얼굴로 내가 먼저 눈인사를 해야겠다’라며 두 눈을 두리번거린다. 걸으면서 되뇐다. ‘내가 남을 보지 않으면 남도 나를 보지 않는다.’"

 

 

 

 

 

   눈인사         /    장병선

 

   출근길, 여의도역에서다.
   전부터 몇 번 눈이 마주쳤던 낯익은 여인의 눈인사를 받는다. 미소 띤 환한 얼굴, 얼떨결에 나도 목례目禮한다.
   언제 어디에서 만났을까? 기억이 묘연하다. 같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만난 이웃일지 모르지만, 그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사무실 창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시는 내내 그 환한 표정이 꽃처럼 흔들린다. 다시 만날 땐 아이스크림이라도 같이 먹어가며 불씨를 찾아야지.
   그런 기대 때문인지 온종일 기분이 좋다. 좀처럼 진전이 없던 글도 뒷말이 꼬리를 물며 실처럼 슬슬 풀려나온다. 눈인사 한 번 받고 답례한 게 이런 동력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쳤을까? 아침마다 전철 타고 사무실에 출근한다. 여의도가 증권가라서 그런지 역에서 나온 사람들의 눈은 하나같이 스마트폰에 가 있다. 화면을 보며, 그으며 걷는다. 오가는 이가 다 그러하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발을 떼자마자 으레 손 전화를 연다. 카카오톡·메시지·밴드 앱App을 눌러대며 걷는다. 그랬는데 오늘은 비둘기 한 쌍이 내 앞에 훨훨 날아가고 있어, 슬쩍 고개 드는 순간 그 여인의 시선을 받았으니, 인연인지 모르겠다.
   ‘눈인사, 참 중요하다’란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이 편리하긴 하지만, 그 장점만큼이나 놓치는 게 많다. 손 흔드는 가로수의 반김을, 훨훨 날아가는 철새들의 날갯짓을, 아침을 여는 해맑은 햇살을…. 그것보다 오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친다. 손잡을 수 있는 반가운 이를 보지 못한다. 눈이 화면에 가 있으니, 만날 사람을 못 보는 건 당연하다.
   그동안 놓친 사람들이 아쉽다. 뭣이 그리 급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까. 책 읽고 글 쓰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요즘이 아닌가. 그런 내가 무엇 때문에 촌음을 아껴 쓰는 직장인들처럼 스마트폰 화면에 집착하였을까. 눈뜬장님으로 걸었을까?
   남 따라 그랬다. 직업상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사건·사고 뉴스나 증권 시세 등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현업원들이 화면에 눈을 굴리고 있어, 나도 무의식적으로 따라 했을 것이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도 흐르는 물결에 그냥 실려 다닌 자신! 줏대 없이 남의 그림자만 쫓은 ‘삶의 지각생’이 이래서가 아닐까?
   때론 시시각각 일어나는 사건 뉴스나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쳤을 귀한 사람에 비견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 곁을 지나가는 이도 언젠가 다시 만나거나 앞으로 눈인사할 인연으로 이어질 사람이지 싶다.
   아는 이가, 내가 그리는 사람들이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만나서 오순도순 긴 얘기 나눌 이도, 차마 속내를 내비치지 못하고 얼굴이 저절로 붉어지는 이도 더러 있었을 거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지나치진 않았는가. 안 될 일이다. 손전화 읽는 거로 몇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꽃’ 같은 사람을 놓쳐서야!
   그런 회한 때문일까, 퇴근길에 손전화를 아예 가방 깊숙이 넣는다. 오가는 이의 얼굴을 읽는다. 행여 아침에 본 그 여인이 걸어올까. 낯익은 얼굴이 또 눈에 띌까? 지금부터 ‘낯익은 이가 보이면 미소 띤 얼굴로 내가 먼저 눈인사를 해야겠다’라며 두 눈을 두리번거린다. 걸으면서 되뇐다.
   ‘내가 남을 보지 않으면 남도 나를 보지 않는다.’



장병선 님은 《창작수필》로 등단.  수필집 『스타벅스 가는 길』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