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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3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봄눈 - 김이녹

신아미디어 2018. 12. 24. 13:02

"나는 누굴 위로하는데 서툴렀다. 아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른다. 그냥 얘기를 들어주고 얼마나 힘들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났다. 나의 이런 행동이 어쩌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봄눈         /    김이녹

 

   오늘 기간제 사원으로 첫 출근을 했다. 처음이라 낯설어서 어색했고 몰라서 힘이 들었다. 시큼시큼한 땀 냄새가 날 정도로 정신없는 한나절을 보냈다.
   퇴근 길, 집에 가서 빨리 쉬고 싶은데 걸음은 마음만큼 속도를 내지 못했다. 터벅터벅 그렇게 걸어가다가 지하철 승강장 의자에 앉아 있는 승리 할머니를 보았다. 고개를 숙인 모습이 나보다 더 힘들어 보였다. 안타까웠다. 조심스러운 마음에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그래도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발목을 붙잡는다. 나는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승리 할머니, 안녕하세요?”
   내 목소리에 할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의 9개월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고왔지만 언제 봐도 환하게 짓던 미소는 그동안에 늘어난 주름 사이로 깊이 숨어버린 것 같았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무게가 고스란히 보였다. 애써 엷은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는 담담히 답했다.
   “잘 지냈어요?”
   조용히 전해오는 그 말에 가슴이 먹먹해져서 그냥 미소만 지었다. 예전 같았으면 손녀 얘기도 하고 조카 안부도 물어왔을 텐데 할머니는 속내를 꺼내지 않으셨다. 전 같지 않은 우리 사이로 지하철이 금방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시끄럽게 끼어들었다.
   우리는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할머니는 내게 또 물으셨다. 잘 지냈느냐고.
   나는 할머니를 바로 보지 못하고 네, 하는데 먹먹했던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눈물을 참으려고, 참아보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무슨 말인가 다시 묻는데 그 말은 들리지 않고 눈물만 뚝뚝 떨어졌다. 할머니는 놀라 무슨 일 있느냐며 오히려 우리 집 안부를 물으셨다. 나는 대답 대신 눈물 젖은 목소리로 “승리를 봤어요.” 라고 말했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 아침햇살 속으로 바람을 타며 작은 꽃잎 같은게 간간히 하얗게 날렸다. 설마, 눈은 아니겠지, 경칩이 내일인데. 그날, 슈퍼마켓 가는 늦은 오후에도 꽃잎처럼 눈이 내렸다. 손바닥으로 받는데 닿자마자 녹았다. 눈이었다. 봄눈이었다. 겨울에 내리는 눈은 펄펄 내려 소복소복 쌓이지만 3월에 내리는 눈은 폴폴 내려 쉽게 사그라졌다.
   나는 들에서 나물을 캐듯 달래, 냉이를 골라 장바구니에 봄을 담았다. 쑥은 없나 찾고 있는데 누가 불렀다.
   “소희 고모!”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얇은 털모자를 쓴 여자 아이가 웃고 있었다. 누구지, 하는 사이 그 아이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승리다. 긴 머리는 아니어도 해맑은 웃음은 아니어도 쌍꺼풀 없이 예쁜 눈, 야무진 입이 승리다. 반가워서 정말 반가워서 달려가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몸은 마음 같지 않았다. 예전처럼 “승리야 뭐 사러왔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봐. 고모가 사줄게.” 속마음과는 달리 말은 직선으로 차분히 흘렀다.
   “승리구나, 안녕.”


   승리는 조카하고 같은 유치원을 다녔고 초등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 둘은 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승리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전학을 갔나, 그러면 말을 했을 텐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그렇게 궁금증이 점점 희미해질 때쯤에 승리가 백혈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뜻밖의 소식에 나는 너무 놀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승리 할머니는 한 달 내내 눈물만 흘렸다고 했다. 어찌 한 달 만이겠는가.
   그런 승리가 잘 이겨내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고 많이 보고 싶었는데 갑자기 나타나 지금 내 앞에 웃으며 서 있는 것이다. 아무렇지않게 전처럼 대해주지 못하고 승리의 시선을 피하며 나는 물건을 하나하나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승리가 조카의 소식을 물어 왔다.
   “소희는 잘 있어요?”
   “잘 있지.”
   하는데 마음이 자꾸만 울컥울컥 했다. 산 물건을 챙기면서 그 마음도 주섬주섬 까만 비닐봉지에 담았다. 이번엔 소희는 어디 있는지 물었다.
   “태권도장에.”
   말해놓고 생각 없이 말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다음에 보자는 말을 하고 승리 곁을 지나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뒤돌아 볼 수가 없었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지하철은 우리의 이야기를 싣고 달렸다. 며칠 전에 승리를 봤다고 했더니 할머니는 그제야 그랬구나, 하며 속 이야기를 하셨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골수이식을 받아 이제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이제는 괜찮다는 말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하면서도 눈물은 나를 따라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런 나를 보고 승리 할머니는 속상하신 듯 한숨을 섞어 말씀하셨다.
   “미안하게 왜 그래? 마음이 여린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할머니를 불편하게 한 것 같아서 승강장에 조금만 있다 가겠다고 했다. 그럼, 그렇게 하라며 할머니는 뒤돌아 가셨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내 자신에게 한 소리 해댔다. ‘지 까짓게 뭐라고 눈물을 보여.’
   나는 누굴 위로하는데 서툴렀다. 아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른다. 그냥 얘기를 들어주고 얼마나 힘들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났다. 나의 이런 행동이 어쩌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더구나 오늘 나는 승리로 노심초사하다가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할머니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 않았나 싶어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내 속을 얼른 쓰다듬고 서둘러 승강장을 빠져 나갔다. 저만치 버스정류장에 환승할 차가 멈춰 있는 걸 보고 열심히 뛰었다. 뛰는 내 발걸음이 며칠 전에 내린 봄눈처럼 폴폴 길 위로 날렸다.



김이녹 님은 《좋은수필》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