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1월호, 통권205호 I 사색의 창] 너에게로 가는 길 - 이옥순
“걷고 걸어도 다 알 수 없는 호수의 넓은 품에서 나는 편안하고 느리게 걷는다. 어떤 의무감도 느끼지 않는다. 공감이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옷도, 신발도 그저 있는 그대로다. 그냥 말없이 가을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너에게로 가는 길 - 이옥순
집 근처에 호수가 있다. 말하자면 호수의 한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그 호수의 전체 크기는 내 느낌으로는 가늠할 수가 없다. 가끔 차를 타고 둘러보기도 하는데, 그래 봐도 어느 한 부분일 뿐 아직 전체를 돌아보지 못했다. 전체를 알든 모르든 호수의 매력은 끝이 없다. 어쩌다 시간이 나거나 운동의 필요를 느낄 때 호수를 따라 걷는데, 그때마다 난 어디를 헤매다가 이제야 여기에 왔는가 하는 후회를 한다. 어느 때고 그런 마음이 들고, 특히 억새가 피기 시작하면 마음 바닥으로부터 미안함이 더 강하게 일어난다. 가까이에 이런 호수를 두고 멀리 다른 호수를 찾아 여행을 다녀온 것에 대해 느끼는 미안쩍음이다.
유리알처럼 파란 하늘에 하얀 양떼구름, 누구든 카메라를 슬며시 꺼내들게 만드는 풍경이다. 멀리 여행이라도 가고 싶던 마음을 슬그머니 내려놓게 된다. 생각이 맑아지고 마음이 그윽해진다. 또 외롭고 서글퍼지기도 한다. 외로움, 서글픔 같은 것은 마음이 순수해지고 착해졌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가을 풍경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마음을 건드리는 애잔한 무엇을 품고 있어서 반성의 감정을 갖게도 한다. 그런 감정은 일상의 주변에서 아무런 부담이나 의무감이 없을 때 가질 수 있다.
나는 중요한 것을 멀리서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주 잊어버린다. 그러지 말아야지 해놓고 또 그런다. 매일보고 가까이 있는 것보다는, 멀리 있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더 좋은 무엇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자주 한다는 것이다. 여행을 계획하는 것도 그런 착각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비행기 표를 끊고 가방을 싸고, 많은 시간과 마음을 낸다. 검색대 통과같은 복잡한 일들도 흔쾌히 감수한다. 집에서라면 두 시간이면 아팠을 어깨가 열두 시간 비행기를 타고도 멀쩡하다. 여행 동안은 즐거워야 한다는 것을 명증하기 위한 단순한 이유만으로 저절로 그렇게 된다. 알고 보면 여행은 참을성 테스트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집에서는 아프던 어깨가 여행지에서는 멀쩡해지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일상이 아닌 곳에서는 어떤 힘이 작용한다. 그 어떤 힘이라는 건 의무감같은 것이다. 감정 오버와 감정 절제, 예의가 필요하다. 볼프강 호수에서도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느라 나는 내 깊은 내면까지 내려가지를 못했다. 젤암제, 할슈타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먼 거리를 이동해 가고, 집 아닌 곳에서 잠을 자고, 남들이 많이 가는 곳을 찾아간 수고에 따른 보상에 들떴었다. 여행지에서는 그런 감정들에 취해 차분해지기가 어렵다.
엊그제 집 근처 호숫가를 걸을 때였다. 가을이 되자 그리움 같은 게 조금씩 고였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마침 등산 동인이 같이 걷자는 전화를 걸어왔다. 호수의 경치에 대한 찬사가 필요했고, 가을 풍경을 잘 표현한 어떤 노랫말이나 시 같은 걸 생각해내려고 애도 썼다.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한 이문재 시인의 <농담>을 생각해내고는 그걸 주저리주저리 읊었다. 그리고 막 억새가 피기 시작한 그 길 끝에 서자 남편을 향한 미안함 같은 게 일었다. 등산을 제안한 그에게 어깨가 아프다는 이유로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억새가 핀 호숫가에 섰다. 억새가 필 즈음이면 산책하는 사람이 부쩍 는다. 그 길에는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도 아마 나처럼 이 호수를 두고 멀리 다른 호수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가 미안한 마음을 안고 달려왔으리라 짐작해본다. 걷고 걸어도 다 알 수 없는 호수의 넓은 품에서 나는 편안하고 느리게 걷는다. 어떤 의무감도 느끼지 않는다. 공감이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옷도, 신발도 그저 있는 그대로다. 그냥 말없이 가을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