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좋은수필/좋은수필 본문

『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3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개 혀 - 김혜식

신아미디어 2018. 12. 13. 17:08

"그동안 인간 가슴에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생명을 지켜준 우리 아니던가. 인간 곁에서 삶의 지킴이 역할을 충분히 해낸 우리다. 삶의 활력제이기도 한 우리를 남정네들의 정력제로 착각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 혀         /    김혜식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를 존경한다. 쇼팽이 자신의 음악에 나를 등장 시키게 한 게 그녀 아니던가. 조르주 상드 덕분에 쇼팽의 음악 속에 영원히 아름다운 화석으로 남은 나다. 불멸의 음악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영광을 안았기에 나는 그녀를 생애 최고의 은인으로 여기기도 한다. 쇼팽은 자신의 연인 못지않게 나를 사랑스러워했나보다. 음악 도입 부분에 반복되는 멜로디에 귀 기울여보면 금세 쇼팽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쇼팽이 지은 ‘강아지 왈츠’가 그것이다. 이 음악에 심취하노라면 꼬리를 물고 뱅뱅 도는 나의 모습이 절로 연상됨을 느낄 것이다. 쇼팽은 이 음악의 도입 부분에 멜로디를 반복하게 함으로써 내 모습의 상징성을 한껏 표현하였다.
   쇼팽이 아니어도 나는 무릇 사랑받는 동물이다. 오죽하면 나를 두고 인간들은 반려견이라 칭할까. 반려견이라는 말이 맞긴 맞나보다. 어떤 여성은 시장에 갈 때 나를 마치 아기처럼 처네로 업고도 간다. 어디 이뿐인가. 사람들은 나를 친구처럼 혹은 연인처럼, 자식처럼 여겨 알록달록 예쁜 옷도 사주고 앙증맞은 액세서리로 내 몸을 치장하는 일에 지갑 열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평소 자신들의 부모님 영양제는 제대로 안 챙기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애견 백화점에서 파는 홍삼이 가미된 고가의 먹이며 나의 몸에 좋다는 영양제는 거리낌 없이 사준다. 여행 시에는 쾌적한 애견 호텔에 나를 며칠씩 머무르게 배려도 한다. 심지어는 애견 미용사에게 나를 맡겨 발톱 손질은 필수고 지옥 염천인 여름철엔 몸의 털북숭이도 시원스레 밀어준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이토록 애정을 쏟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를 통하여 자기네들의 정서적 안정을 도모하기 때문 아닌가.
   나를 비롯 우리 무리를 일컫는 말에는 여러 말들이 있다. 굳이 ‘오수의 개’를 칭하지 않아도 흔히 인간들은 충견이라고 추켜세우곤 한다. 우리가 충견이란 말을 듣게끔 행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얼마전 주인을 구하기 위해 도로에서 차량을 세운 덕구라는 친구 이야기가 인간들의 심금을 울린 적 있다. 덕구는 자신의 주인이 술에 취해 차도에 반쯤 몸을 걸치고 누운 것을 보고 도로 한가운데 앉아서 차량들을 멈추게 하였다. 덕구의 이 행동은 만취한 주인 생명을 어렵사리 구하였다.
   덕구 이야기가 만인의 가슴을 울린 것은 우리 종種들이 동물이어서일 게다. 우리 종족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만큼 사리분별도 못하고 지능도 뒤떨어지고 따뜻한 가슴도 없다. 사람들이 짐승인 덕구의 행동에 더 감동을 받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무리의 야생성을 덮어둔 언사이다. 오로지 충견이라 명칭한 것은 순전히 인간들의 종 차별 주의에 의해서인 것만은 사실이다.
   인간들이 미처 모르는 나의 특성이 있다. 나도 사회적 동물이다. 같은 무리에 있으면 공동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동물적 본능이 발동하기도 한다. 덕구의 이 행동도 어쩌면 이런 특성에 의한 행동이니 사람들은 너무 감격해 할 필요가 없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동안 가축으로서 길들여져 인간의 집을 지켰고 발달된 후각은 군사용으로도 활용되어 왔다.
   일례로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인들이 우리 무리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에 사용한 게 그것이다. 우리 개들이 맡은 역할은 주로 전령, 정찰, 감시 등이었지만 전쟁터에 보급품 수레를 끌기도 했다. 또한 우리들의 몸은 그 자체가 무기로 둔갑하기도 하였잖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은 독일 탱크를 폭파시키기 위해 우리 무리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탱크 밑에 먹을 것을 두고 찾게 하거나 먹을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그리곤 인간들은 며칠씩 우리 무리들을 굶기는 잔인성을 보였다. 그 후 우리들 등에 폭발물을 장착, 전투장 한가운데로 몰아넣어 독일군 탱크 밑에 숨겨진 먹이를 찾게 하였다. 이때 배를 주린 우리들은 짊어진 폭발물이 터지면서 몸도 흔적 없이 사라졌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우리의 죽음을 장렬히 전사했다고 평가받은 적이 없다. 그야말로 개죽음이었을 뿐이다.
   이는 오로지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서이다. 가까운 예로 베트남 전쟁 시 수 천 마리의 개들을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엔 살아남은 개들의 야생성이 위험하다는 핑계로 혹은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미군들은 잔인하게 도살시켰잖은가. 이러한 일들은 인간들의 평화와 자유,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인간 중심적 방편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 무리들이 인간들에 의해 수난을 겪는 일이 이것만이 아니다. 인간에게 인격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개로써 견격犬格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게 인간들의 잔혹성 때문이다. 예로부터 인간들의 착취에 의해 동물들이 무수히 희생되었다. 매년 인간들의 이윤을 위해 실험하는 수억 마리의 동물들 중에 개들도 가끔 희생되고 있다. 이도 모자라 걸핏하면 인간사의 악행이나 그릇된 언행은 나에게 죄다 빗대어 표현한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개만도 못하다’ , ‘오뉴월 개 팔자’, ‘개 눈엔 똥만 보인다’. ‘개밥의 도토리’ 등이 그것이다. 이즈막은 동물 보호 차원에서 많이 개선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의 몸이 남성들의 정력에 매우 특효하다고 여겨 식용이 된 지 오래다.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몸태를 지닌 살찐 모습의 나를 보면 일부 남정네들은 입안에 군침마저 삼킨다. 군침만 삼키면 그나마 양반이다. 어떤 남정네들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우리 몸을 훑어보며 곁의 사람에게 이런 말까지 건넨다.
   “어이! 친구! 개 혀?”
   “좋지! 오늘 점심은 영양탕이나 한 그릇 해볼까?”
   이런 대화가 먼 허공에서 들려올 때마다 우리 무리들은 공포에 질려 온몸을 떨어야 했다. 또한 내가 목줄을 과감히 끊고 탈출이라도 할 양이면 이런 말로 인간들은 위안을 삼곤 한다.
   “지금쯤 누렁이는 남의 집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걸.” 즉 이 말은 내가 거리를 헤매다가 개장수한테 잡혀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하여 영양탕 집 솥 안에 들어간 신세가 됐다는 말이기도 하다.
   날로 애견 센터가 거리마다 세워지고 있다. 애견 뷰티 숍 및 호텔도 성행하는 추세다. 반면 다른 한 쪽에선 여전히 좁디좁은 개 장안에 나의 몸이 갇혀야 하고 곧이어 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으스러지며 살점이 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이러한 처참한 몰골은 인간의 욕심 그릇을 채우기 위함이다. 단백질 보충이 꼭 나의 살점이어야만 하는가.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등 돈 몇 푼만 쥐고 나가면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고깃덩어리가 정육점마다 산적해 있지 않던가.
   한때는 전쟁터에서 무기로써 우리의 온몸을 인간들에게 헌신했고 요즘도 인간들의 허허로운 마음을 채워 주는 반려견으로 그 몫을 다하는 우리 무리들이기에 인간들에게 간절한 부탁이 있다.
   제발 주위 사람들에게 사투리로 “개 혀?” 라고 묻는 것을 삼갔으면 한다. 우리의 몸뚱이를 삶고 지지고 볶는 영양탕 집만큼은 올 삼복더위엔 출입하지 말아야 한다. 쇼팽처럼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눈빛을 보내 주기를 감히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동안 인간 가슴에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생명을 지켜준 우리 아니던가. 인간 곁에서 삶의 지킴이 역할을 충분히 해낸 우리다. 삶의 활력제이기도 한 우리를 남정네들의 정력제로 착각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혜식 님은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등단. 저서: 수필집 『내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독서에세이 『예술의 옷을 입다』, 테마 수필집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칼럼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평론집 『예술의 옷을 벗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