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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1월호, 통권205호 I 지상에서 길 찾기] 가을의 숲 - 신규

신아미디어 2018. 12. 13. 16:51

머지않아 가을이 오면 전개될 속리산의 아름다운 변신을 기대해 본다. 숲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변신은 변절이 아니라 단지 생존을 위한 수단이며,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또 다른 시혜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을의 숲    -    신규


   한창 산을 찾아다니던 시절, ‘산행’이란 정상을 정복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점점 산행에 이력이 붙으면서 나무가 보이고, 바위와 계곡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앞다투어 가더라도 서두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길을 찾아갔다. 정상에 올랐을 때 느끼는 쾌감보다, 숲을 보고 산새들의 독백과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로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이 더 즐겁다. 이제 나는 숲의 이야기를 들으려 귀를 기울인다.
   청주시 근교 학교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그해 가을, 이곳 속리산에 소풍을 왔었다. 학생들과 함께 숨을 몰아쉬며 산 정상에 올랐던 일. 문장대에서 문수봉·신선대·비로봉을 지나 천왕봉에 이르는 길에서 느꼈던 아름다운 정경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주 찾아 즐기는 산이 되었고, 때로는 삶의 지혜를 구하는 나만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속리산 등산길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법주사로 가는 참배객과 얼마 전 법주사 입구에서 세심정까지 닦아 놓은 숲속의 오솔길을 걸으려는 산책객, 문장대에 오르려는 등산객이 어우러져 활기차면서도 진지하다.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호숫가를 따라 이어진 오솔길은 이미 가을로 접어든 느낌이다.
   세심정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복천암으로 가는 길이다. 얼마 가지 않아 하늘 높이 우람하게 서 있는 낙엽송 두 그루를 만난다. 이웃하여 마주 서있는 모습이 형제처럼 다정하게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든든한 친구 같기도 하다. 언젠가 중년을 넘긴 듯한 여인이 그 앞에 서서 합장하고 절을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하필이면 낙엽송 앞에서 기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나도 그 나무 앞에 선다. 그녀의 간절한 기원은 무엇이었을까. 인생무상, 인생의 덧없음에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아 저 나무처럼 곧게 살아가기를 기원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녀들이 동량지재棟梁之材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모정이었을까.
   복천암을 지나 숲으로 들어선다. 나무들이 서 있는 환경도 가지가지다. 양지바른 좋은 땅에서 무탈하게 자란 나무가 있는가 하면, 바위틈에 끼여 겨우 생명을 부지하다가 결국은 바위를 비켜나와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가 있다. 심지어 바위 밑에서 시작하여 종당에는 바위에 올라앉아 있는 듯한 나무, 벼랑 끝에 겨우 매달려 있는 나무도 있다.
   모양새도 그렇다. 어떤 나무는 부동자세로 반듯하게 서 있는 모범생 같고, 어느 것은 한쪽 발에 힘을 빼고 삐딱하게 서 있는 겉멋쟁이 같다. 또 어느 것은 맞대고 사이좋게 자라는가 하면, 어느 것은 다른 나무에 얹혀 염치좋게 기어오르거나 바닥에 누워있는 나무도 있다.
   저쪽, 큰 나무 아래에 고목나무가 습기를 잔뜩 머금은 채 쓰러져 있다. 여러 곳이 썩어 파이고, 굵기로 미루어보아 상당히 오래된 나무인 듯하다. 쓰러지기 전에는 숲을 지키던 믿음직한 나무였으리라. 지금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허망한 꿈을 접고 무심의 경지에 누워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쓸모없이 노지에 버려지지 않고 숲의 식구로 남아 미물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되었고, 산짐승들에게는 쉼터가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길 것이다.
   숲은 자연으로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조변석개하는 인위적인 원칙보다 더 엄격한 질서와 생존 비결이 있어야한다. 이들은 서로 옥신각신하다가도 경우에 따라 어우러지지만 자신의 본질을 버리지 않는다. 문득 숲은 인간사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 사람들의 인생역정이 숲의 나무가 되어 한눈에 들어온다. 나의 나무는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일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보현재를 넘어선다. 골짜기에서 불어온 상쾌한 기운이 땀을 가신다. 수없이 넘나들며 느꼈던 숲의 사계절을 생각해 본다. 모두 그런대로 특징이 있다. 겨울의 숲이 폐허의 들판이라면, 봄은 그 폐허 위에서 환생하는 계절이다. 숲의 정령들이 서서히 구각을 뚫고 나오면 침묵의 질서는 다시 무너지고 앞을 다투어 영역 차지의 경쟁을 시작한다. 여름은 그 절정이다. 어느 것은 키를 높이고, 또 어느 것은 공간을 넓혀 나간다. 이도저도 아닌 녀석은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나마 가끔 내리쪼이는 햇볕으로 생명을 지킨다.
   봄과 여름이 성장을 위한 경쟁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성장을 멈추고 수렴하는 계절이다. 가을은 인간에게는 풍요로울지 모르지만, 숲에게 가을은 비정한 이별의 계절이다. 애써 가꾸어 온 열매와 잎을 버리고, 때로는 색깔로 위장하고 스스로 가지를 자르며 시련을 견딘다.
   어느덧 냉천골이다. 석간수 한 모금으로 기운을 차리고 마지막 힘을 다한다. 먼 빛으로 문장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비탈진 숲 사이로 소나무들이 다소곳이 서 있다. 사람들은 사시장철 색깔이 변하지 않는 나무를 지조가 굳은 선비에 비하고,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나무는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에 비했다.
   옛적엔 항상 구름에 싸여 고고했던 곳,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문장대에 오른다. 유례없이 무더웠던 지난여름을 피해 오랜만의 산행이어서인지 천지사방이 모두 새롭다.
   머지않아 가을이 오면 전개될 속리산의 아름다운 변신을 기대해 본다. 숲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변신은 변절이 아니라 단지 생존을 위한 수단이며,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또 다른 시혜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