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인간과 문학/인간과문학 수상작

[인간과문학] 제6회 신인작품상, 소설 부문 당선자 '황병욱'님을 소개합니다.

신아미디어 2018. 12. 10. 15:39

제6회 인간과문학 신인작품상 소설 부문 당선자 '황병욱'님의 소설 전문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다크 초콜릿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조심스레 길 건너 편의점을 살폈다. 경찰이 편의점 안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편의점 앞에 있는 간이 테이블에는 아직 식지 않은 컵라면이 나무젓가락이 꽂힌 채로 그대로 있었다. 경찰은 캔 커피 두 개를 들고 편의점에서 나와 도로변에 세워놓은 순찰차에 올라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길게 나왔다. 옆에 있던 민이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민의 손에 땀이 배어 있었다. 나는 민을 쳐다봤다. 긴장하기는 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건너편을 쳐다보고 있던 민의 눈이 갑자기 경직되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경찰이 차에서 내려 우리가 컵라면을 먹고 있던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혔다. 젠장!
   편의점 테이블 의자에 앉아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민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테이블 끝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민이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내 앞에 놓았다. 작은 소라가 매달려 있는 열쇠고리였다. 나는 열쇠고리와 민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열쇠는 얼핏 봐도 오래된 것 같았다. 민은 이런저런 설명도 없이 컵라면 뚜껑을 열고 나무젓가락으로 몇 번 휘젓더니 컵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작은 소라에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오래되어 반질거리는 작은 소라에 비해 이니셜은 최근에 새긴 것처럼 표면이 거칠었다. 기계로 정교하게 새긴 것이 아닌 칼이나 가위, 혹은 송곳 같은 뾰족한 무언가로 긁어서 투박하게 새겨진 이니셜은 마치 작은 소라의 이름처럼 보였다. 나는 이니셜이 무슨 뜻일까 고민하다가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약간 불어서 물컹해진 면발을 입에 넣으면서 단무지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골목에서 나와 편의점 쪽으로 오는 순찰차를 발견했다. 나는 급하게 민을 잡아끌고 편의점 건너편 건물로 뛰었다. 그때 깜빡하고 민의 열쇠를 편의점 테이블에 놓고 온 것이다.
   경찰은 열쇠고리를 집어 들었다. 열쇠고리에 매달린 작은 소라가 경찰 눈앞에서 대롱거렸다. 경찰은 열쇠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는 편의점에 들어가 점원에게 열쇠 주인을 물어보는 것 같았다. 맞잡은 민의 손이 살짝 떨렸다.
   경찰은 점원에게 열쇠를 넘기고는 편의점을 나오려다 멈춰 섰다. 딸랑. 문에 달려 있는 종소리가 끝까지 울리지 못하고 다시 닫혔다. 경찰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점원에게 열쇠를 돌려받았다. 편의점을 나온 경찰은 열쇠를 오른손 검지에 끼워 빙글빙글 돌리면서 순찰차에 올라탔다. 순찰차는 깜박이를 켜고 부드럽게 편의점 앞을 빠져나갔다.
   “안 돼…….”
   신음하듯 내뱉은 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은 내 손을 뿌리치고 급하게 대로로 나가 사라지는 순찰차를 눈으로 쫓았다. 나도 민을 쫓아 건물 밖으로 나왔다. 순찰차는 교차로에서 신호를 받자 빠르게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민은 순찰차가 사라진 쪽을 한동안 바라봤다. 민의 손이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민의 손을 이끌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민을 편의점 밖에 세워 놓은 채 안으로 들어가 점원에게 열쇠에 대해 물었다. 잠시 화장실 갔다 온 사이에 열쇠가 없어졌다며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점원은 경찰이 가져갔다며 주인이 찾으러 오면 파출소로 오라고 전했다고 말했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파출소 위치를 물어보고 밖으로 나왔다.
   민은 불안한 눈빛으로 왼손 엄지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나는 민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딱히 떠오르는 생각도 없었다.
   “중요한 열쇠야? 그냥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면 안 돼?”
   민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몸을 바르르 떨며 어느 새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떻게 하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일단 파출소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민은 경찰차를 타고 왔다. 미술심리치료 시간이었다. 미술을 전공했다는 젊은 여자 선생님의 무료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한쪽 귀로 흘러 보내면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경광등이 꺼진 경찰차 한 대가 병원 정문을 지나 본관 쪽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경찰차를 보자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졌다. 본관 정문에 멈춘 경찰차에서 분홍색 난방을 입은 민이 내렸다. 경찰 두 명이 고개를 숙인 민을 양쪽에서 부축해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민을 다시 만난 건 민이 경찰차에서 내린 지 한 달이 지난 후였다. 검정깨가 넘친 그릇을 잘못해서 확 쏟은 것처럼 얼굴에 주근깨가 만연한 미술심리치료 선생님 시간이었다. 녀석들은 미술심리치료 선생님을 범벅이라고 불렀다. 얼굴에 주근깨가 너무 많아 깨범벅에서 깨를 빼고 범벅이라고 불렀다. 범벅은 녀석들과 소통하기 위해 가끔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곤 했다. 시시껄렁하게 거들먹거리며 녀석들이 쓰지 않는 은어를 남발했다. 녀석들은 가끔 범벅이 하는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 주었지만, 수업이 끝나고 범벅이 나가면 녀석들은 곧바로 “좋텐다~ 오늘도 신이 났구나”하며 비아냥거렸다.
   민은 맨 뒤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 두 시간 내내 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범벅은 게임 중독으로 들어온 녀석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각종 아이템을 주고받으며 스킬과 캐릭터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아마 범벅은 왕따임이 분명했다. 범벅도 집구석에 갇혀 게임에만 몰두할 것처럼 보였다. 때론 병원에 들어와 있는 우리가 아니라 범벅처럼 치료사나 간호사들이 더 이상해 보일 때가 있었다. 범벅은 게임 중독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민을 힐끗거렸다. 새로 사람이 들어오면 범벅은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새로 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민하고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민은 흰 도화지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두 시간 내내 어떤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미술심리치료 시간에 들어온 지 이주일 만에 민이 색연필을 잡았다. 사절 도화지 가장자리부터 검은색을 조금씩 칠하기 시작했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일주일 내내 한 도화지에 검은색만 칠했다. 어떤 형태나 문양도 없었다. 빈틈없이 검은색으로 꽉 채운 도화지에 민은 검은색 색연필로 계속 덧칠을 했다.
   사건은 종이접기 시간에 일어났다. 범벅은 우리들에게 색종이와 가위를 나눠줬다. 각자가 원하는 색깔의 색종이를 가위로 잘라 다양한 소품으로 장식을 하는 거였다. 민은 색종이와 가위를 책상 한쪽으로 치워 놓고 일주일 내내 검은색으로 덧칠한 도화지를 펼쳤다. 그리고 다시 검은색 색연필로 덧칠을 하기 시작했다. 범벅은 아이들의 가위질을 도와주며 돌아다니다 여전히 색칠을 하고 있는 민에게 다가갔다. 범벅은 민이 덧칠하는 것을 뒤에 서서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때 무언가를 본 것일까.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범벅은 민의 그림에서 찾아낸 것일까. 칠흑 같은 검은 장막만 펼쳐져 있는 민의 도화지를 보더니 범벅은 한마디 했다.
   “참, 아름답네요.”
   범벅의 얘기를 들었는지 민은 아주 작게 콧소리를 냈다.
   “흥!”
   범벅의 말에 민이 반응을 한 것이다. 그때까지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던 민이었다. 누가 민에게 말을 걸어도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었다. 마치 유령처럼 움직였고, 투명인간처럼 돌아다녔다. 그런 민이 범벅의 말에 처음 반응을 보였다. 범벅은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자신의 말에 반응하는 민을 보고 범벅은 자신감을 얻었는지 몇 마디를 더했다.
   “여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예요?”
   도화지에 검은색으로 덧칠하던 민의 손이 점점 느려지다가 도화지 가운데에서 멈췄다. 민은 색연필을 도화지 가운데에 가만히 내려놓고는 한쪽으로 치워 놓은 가위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범벅의 왼쪽 손목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니, 에미다!”
   민은 범벅의 왼쪽 손목을 가위로 그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범벅의 손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범벅의 왼쪽 손목을 움켜잡은 민은 범벅의 피로 마치 그림을 그리듯 도화지에 범벅의 피를 문질렀다. 민의 손아귀 힘이 세서 그런지 범벅이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좀처럼 풀려나지 못했다. 아니, 너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당황해서 그런지 범벅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민은 바동거리는 범벅의 손목을 잡고 도화지 위에 원을 그리며 피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가위를 자신의 목에 가져갔다. 민이 자신의 목을 가위로 그으려는 찰라 내가 민을 덮쳤다. 의자에 앉아 있던 민과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범벅은 민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고, 민은 계속해서 가위로 목을 그으려고 했다. 나는 민을 바닥 쪽으로 깔고 누워 가위가 민의 목에 닿지 않게 하려고 내 가슴으로 민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민은 내 등을 계속해서 가위로 그었다. 긋고, 긋고, 또 그었다. 민의 울부짖음은 거친 숨소리에 섞여 치료실 안을 가득 메웠다. 내 옷이 너덜해지고, 가위 통증이 파고들었다. 그 자리마다 맺혔을 것이다. 이때쯤 간호사들이 달려들어 민의 손에서 가위를 뺏었다. 가위를 뺏긴 민은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경직되었던 몸이 풀리면서 나는 고개를 들어 민을 쳐다봤다. 눈을 감고 머리를 세차게 흔드는 민의 눈에 작은 눈물이 새어나왔다. 눈물은 얼굴 윤곽을 타고 흐르지도, 세차게 흔드는 고개에 떠밀려 떨어져 나가지도 않았다. 투명한 눈물은 민의 눈 가장자리에 마치 작은 섬처럼 맺혀 있었다. 그렇게 민과 나는 살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파출소를 찾아가는 내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복잡했다. 파출소는 술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번화가 건너편에 있었다. 낮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다세대 집들이 시작되는 횡단보도 앞에 있었다.
   민은 여전히 불안한지 떨고 있었다. 편의점에서부터 민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 앞까지 오는 내내 민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 작은 미세한 떨림에서 민의 심장이 느껴졌다. 떨림은 심장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극도의 공포를 느낄 때 영화에서처럼 괴성이 터져 나오거나 심장 소리가 지구를 울릴 만큼 쿵쾅거리지 않는다. 온몸 전체가 아주 가느다랗게 진동한다. 그래서 생각은 있지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게 된다. 범벅이 민에게 손목을 잡혔을 때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도 그랬다. 움직임 없는 떨림으로 공포를 끌어안고 있었다. 입안에 고인 붉은 핏물을 힘없이 흘리며…….
   아버지는 철거 작업을 할 때 주웠다며 아이스하키 스틱을 하나 가지고 왔었다. 아버지는 아이스하키 스틱 손잡이 부분을 검은색 전기 테이프로 촘촘하게 감았다. 그러고는 아이스하키 스틱을 휘두르며 한마디 했다.
   “히야, 이 골프채 마음에 드는데.”
   그날부터 아버지는 집안에 굴러다니는 것이라면 뭐든지 아이스하키 스틱으로 골프를 쳤다. 처음에는 세숫대야가 홀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구멍이 작은 것이 홀이 되었다. 모자에서 종이컵으로, 맥주잔에서 소주잔으로.
   공도 처음에는 실타래로 시작했다가 언젠가 브로콜리를 사 가지고 오더니 이제는 칼라플하게 쳐야 한다며 파프리카를 색색별로 사가지고 와서는 집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하지만 너무 쉽게 홀인원이 된다면서 소주잔으로 홀을 바꾸었다. 그랬더니 더 작은 공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과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는 최적의 공을 찾았다. 오징어땅콩. 소주잔을 옆으로 누워 놓고, 오징어땅콩 과자를 살짝 건드려 소주잔에 넣는 것을 매일 집에 들어와서 잠들기 전까지 했다.
   공이 작아지니까 아이스하키 스틱이 바닥을 긁는 경우가 많아졌다. 진짜 골프 연습장에서 시원하게 골프채로 공을 타격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아이스하키 스틱으로 바닥을 긁으며 신중하게 오징어땅콩 과자를 치다 보니 어느새 바닥은 닿다 못해 패이기까지 했다.
   바닥이 이 지경이 될 정도이니 아래층에서는 소음이 얼마나 컸을까. 결국 아래층 주인이 자정이 지나 새벽 한 시가 될 때쯤 현관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아버지는 여전히 아이스하키 스틱으로 바닥을 열심히 긁으며 오징어땅콩을 소주잔에 넣고 있었다.
   “야, 이 씨발 새끼야!”
   현관문이 열리자 아래층 주인의 분노 섞인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아래층 주인은 다짜고짜 아버지 멱살을 부여잡고 집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어, 어!”
   아버지는 배가 남산만큼 나온 아래층 배불뚝이에게 제압당한 채 버둥거렸다.
   “이 씨발 놈아 너는 양심도 없냐, 지금 몇 시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 개새끼야!”
   배불뚝이는 왼손으로 아버지 목을 조이면서 오른손으로 싸대기를 날렸다. 아버지는 숨이 막히는지 배불뚝이의 싸대기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완강하게 목줄을 쥐고 있는 왼손을 어떻게든 풀어 보려고 노력했다.
   배불뚝이도 어지간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이스하기 스틱으로 바닥을 긁을 때마다 같은 집에 사는 우리도 온몸에 털이 쭈뼛쭈뼛 설 정도였다. 게다가 집에서 술을 마시는 날이면 어김없이 소주병 위에 오징어땅콩을 올려놓고, 바닥에 있는 오징어땅콩을 쳐서 소주병 위에 올려놓은 오징어땅콩을 맞추는 묘기를 연습했다. 그럴때면 바닥에 놓은 오징어땅콩이 공중으로 튀어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아이스하키 스틱은 오징어땅콩의 아랫부분을 깎듯이 내리쳐야 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깊게 바닥을 긁어야 했다. 아버지는 육 개월이 넘도록 밤마다 바닥을 긁고, 또 긁어 댔다. 벅……벅…….
   배불뚝이의 싸대기는 쉼 없이 아버지 왼쪽 얼굴을 강타했다. 아버지의 왼쪽 얼굴이 금세 벌겋게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코피가 터졌다.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 얼굴이 점점 형체 없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러다 사람 잡겠어요.”
   어머니였다. 방에 있던 어머니가 달려 나와 배불뚝이에게 매달렸다.
   “씨발 진짜! 뭔 놈의 집구석이 이따위야!”
   싸대기를 날리던 배불뚝이의 오른팔에 매달린 어머니를 배불뚝이는 아주 쉽게, 정말 쉽게 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아담한 체형인 어머니는 휙 하고 날더니 화장실 문고리에 뒤통수를 찧고 바닥에 쓰러졌다.
   “어라, 아주 생쇼를 하네. 저렇게까지 날아가? 무슨 자해공갈단이야? 씨팔! 진짜 자해를 해 줘?”
   배불뚝이는 한쪽 얼굴이 못 알아 볼 정도로 부은 아버지 목줄을 쥔 채로 화장실 앞에 쓰러진 어머니에게 갔다. 그리고 발을 들어 어머니 얼굴을 세게 밟았다. 쿵. 어머니가 고개를 들려는 찰라 시커먼 양말을 신은 배불뚝이의 발이 어머니 머리를 밟았고, 어머니는 바닥에 얼굴을 그대로 박고 말았다.
   한 번 더 쿵.
   배불뚝이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배불뚝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고, 어머니는 입에 고인 진득한 피고름을 힘없이 흘리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씨발!”
   배불뚝이가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배불뚝이의 머리를 향해 아이스하기 스틱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이번에는 ‘퍽’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배불뚝이는 나에게 맞은 반대쪽으로 잠시 휘청거리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아버지가 잘 감아놓은 아이스하키 스틱의 검은색 전기 테이프 손잡이 부분을 거머쥐고 주저앉아 있는 배불뚝이의 수박만 한 뒤통수를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죽어! 죽어! 죽여 버리고 말 거야!”
   기억이 없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이지러진 아버지가 등 뒤에서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배불뚝이는 엎어져 있었고, 어머니가 배불뚝이 머리를 가슴으로 안고 내가 내리치는 아이스하키 스틱을 등으로 받아 내고 있었다.
   순간 공포가 밀려왔다. 배불뚝이가 죽었으면 어떻게 하나, 내가 살인을 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공포는 내가 무슨 행동을 했고, 그 행동으로 인해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그건 아직 이성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공포는 이성으로 생각하고 상황 판단을 할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된다. 적막. 적막이 공포를 만들어 냈다. 정지해 버린 시간은 적막이다. 그래서 상황 인식 이전에 적막은 모든 감각을 깨운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멈춰 버린 시간은 암흑으로 인도한다. 그곳에 적막이 있고, 적막은 이성이 눈 뜨기 전에 신체의 모든 감각들을 예민하게 만든다. 날선 모든 감각들이 받아들이는 첫 번째 반응은 어둠과 암흑, 적막과 고요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것이 아니라 내 자체가 어둠이 되고, 적막이 되는 것이다. 공포는 멈춰 버린 시간의 적막에서 어둠을 이끌고 나타난다.
   단단해서, 너무도 단단해서 절대 쪼개지지 않는 세상에 널브러진 장작을 내리치고, 또 내리치다 눈을 떴을 때 시간은 멈춰 버렸다. 흐름이 멈춘 시간에 피멍든 아버지와 피투성이 어머니가 있었다. 그렇게 공포가 어둠을 몰고 왔다.
   다행히 배불뚝이는 죽지 않았다. 나는 초범에 우발적인 행동이 인정되어 실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배불뚝이를 살린 것이 아니라 쪼개지지 않는 단단한 세상에서 나를 구한 것이다.

~ 생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