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2월호, 신작수필20인선 I 흐르는 길 - 피귀자
"한 방울의 물이 모이고 모여 몸피를 늘이며 바다에까지 이른 물은 느리게 더욱 느리게 철썩인다. 흐르고 흐르면서 막히면 새 길을 내고 때로는 장벽을 만나 돌아가기도 한다. 순탄하지만은 않은 물의 길. 사람이 일생 걸어온 여정을 거울인 양 비춰주는 인생길 같다."
흐르는 길 / 피귀자
물의 기척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물의 시원始源 그 속살이 보고 싶어 안달하는 마음을 조붓한 오르막길이 토닥인다. 퐁퐁퐁 세상에 태어남을 알리는 울음소리가 정적을 깨운다. 도도하게 출렁이는 바다, 물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그 시작점, 작은 옹달샘 앞에서 숙연해졌다.
맑고 밝은 물방울은 옹달샘에서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끼마냥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딘다. 새끼는 둥지를 떠나야 진정한 숲의 일원이 되듯이 옹달샘에서 갓 태어난 물은 해맑은 아기처럼 금세 깔깔대며 아래로 골짜기를 따라 흘러간다. 내 마음도 물을 따라 흐른다.
통통 튀어 오르며 흐르는 골짝 물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들 같다. 쉼 없이 재잘대고 뛰고 구르며 물놀이에 홀딱 빠져 생기발랄하다. 흐르는 물은 돌멩이를 굴리고 바위를 굴리며 주체하지 못하는 열정으로 힘차게 쏟아지며 급하게 뛰어내린다. 하얀 입김 뿜는 폭포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씩씩한 기상, 의욕이 앞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빠름을 얻으면 풍경의 유희는 잃게 되나 속도감에 취하여 곁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청소년 같다.
어느새 물줄기는 벌판을 지나며 강둑에는 크고 작은 버드나무 사이로 물안개가 자욱하다. 잔물결 흐르는 모래 깔린 시내는 나긋한 여성처럼 부드럽고 유연하며 광목 띠처럼 펼쳐진 강물은 은비늘처럼 반짝인다. 세상은 초록으로 눈부시고 강의 숨소리에 깨어난 억새의 흔들림이 여유롭다. 나무그늘과 바람소리 벗하며 고기를 살찌우고 들판의 곡식에게도 너른 품을 내어준다. 수많은 습지와 초원을 휘감아 돌며 몸피를 불려 산맥을 넘어온 새들도 보듬어 안고 모든 것을 넉넉히 받아주는 여인의 품. 할 일 많고 맡은 책임에 어깨가 무거운 장년의 모습을 닮았다.
한강 발원지 ‘검용소’를 찾았다. 일억 오천만 년 전 백악기에 형성된 석회암 동굴 소, 작아서 앙증맞기까지 한 그 시작점을. 야생화 만발한 금대봉과 대덕산 사이 비경의 계곡에 자리한 검용소. 금대봉 기슭의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섬, 물골의 물구녕 석간수와 예터굼에서 솟아나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검용소에서 다시 솟아난다니 예사롭지 않다. 소를 둘러싼 푸른 물이끼는 신비함을 더하고, 갈수기에도 마르는 일 없이 힘찬 물 솟음으로 한강 1300리를 흘러가는 우리 민족의 젖줄이요 생명의 근원지다.
새 생명이 태어나듯 물의 시원은 신비하다. TV에서 본 나일강의 발원지도 특이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나일강이 역시 세계 두번째 큰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 바닥에서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수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관계로 솟구치는 기운이 흐르는 물에 덮여 여러 겹의 동그라미를 그리던 그곳. 바다 속이든 깊은 계곡의 옹달샘이든 감출 수 없는 용솟음은 누군가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어떤 강의 시작도 처음은 미약하지만 끝은 한없이 창대해지는 물의 여정. 시원을 떠난 물은 다른 물과 어울려 물결 위에 빠르거나, 쉬엄쉬엄 또 다른 세월을 흘려보내고 그 물길을 따라 사람이 모이고 문명이 발달했다.
시간은 하늘에 뜬구름처럼 흘러 작은 물줄기가 계곡을 곤두박질치다 내를 이루고 강물 되어 어느덧 바다에 이르렀다. 오래된 친구가 기다릴 것만 같은 바다. 노년이 되면 멀리 바람소리와 곁의 사람소리에 귀 기울이며 물때를 읽는 노련한 어부처럼 물과 잘 어우러진다. 적당히 타협하면 포용하지 못할 것이 없다. 한 방울의 물이 모이고 모여 몸피를 늘이며 바다에까지 이른 물은 느리게 더욱 느리게 철썩인다. 흐르고 흐르면서 막히면 새 길을 내고 때로는 장벽을 만나 돌아가기도 한다. 순탄하지만은 않은 물의 길. 사람이 일생 걸어온 여정을 거울인 양 비춰주는 인생길 같다.
피귀자 님은 2003년 《수필과 비평》 등단, 2013년 《창작에세이》 등단, 2014년 《창작에세이》 평론 등단. 수필집: 『종이날개』, 『그대에게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