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2월호, 신작수필20인선 I 임자 만난 보물 - 이종순
"내 손길이 닿을 수 있는 시렁이나 선반 위에 얹혀 있었더라면 여태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쓸모없고 수선스럽다고 진작 불태워 버렸을 것이다. 오랜 세월 높은 곳에 꼭꼭 숨어 있다가 젊은이들의 인생길을 밝히는데 공헌하다니, 새삼 놀라웠다. 박물관에 찾아가 문안인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임자 만난 보물 / 이종순
7년 전 가을, 시제를 지내러 고향 집에 내려갔을 때였다. 다음 날 아침, 예고도 없이 바깥마당에 봉고차 한 대가 들어섰다. 두 남자가 대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더니 정중히 인사를 했다. 품위 있게 생긴 중년 신사가 자기는 안동대학 민속학 교수이며 같이 온 사람은 그의 제자라고 소개를 했다.
“이 댁에 보물이 있다기에 왔습니다.”
“보물이라니요?”
안방에 농짝, 대청 시렁 위에 있던 육십여 개나 되는 밥상도 다 도둑맞고 없었다. 골동품 도둑들이 쌀독에 쥐 드나들듯 수시로 들러 싹 쓸어간 마당이었다. 방마다 훈기를 내던 질화로며 놋화로, 방방이 불을 밝혔던 등잔 등 옛것이라곤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다만 대대로 물려 내려온 교지와 고서적 수백 권과 서간문이 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었다.
“보시다시피 덩그런 빈집인 걸요. 아무것도 보여 드릴 게 없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봐도 되겠습니까?”
교수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제자는 차에서 접이식 알루미늄 사다리를 꺼내왔다. 대청 위, 마루 가운데 사다리를 펴고 들보에 기대세우더니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내 눈도 따라 올라갔다. 시선이 미치는 곳, 대들보 한구석에 흰 물체가 보였다. 제자는 그것을 소중히 껴안고 사다리를 내려왔다. 마치 옛날 여인이 친정갔다 올 때 머리에 이고 온 정성을 싼 보퉁이 같았다.
그들은 모든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 마루는 천장이 높아 웬만한 사다리로는 닿지 않았다. 그들은 긴 사다리를 준비해 와서 아는 집 물건 찾듯 곧바로 올라가서 보퉁이를 안고 내려왔다. 우리는 정작 거기에 그런 것이 있다는 걸 여태껏 알지 못했다.
“이 안에 보물이 있습니다.”
교수는 꽁꽁 싸맨 흰 보따리를 풀었다. 놀부가 박을 타면서 금은보화를 기다리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나는 도대체 저 흰 보퉁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잔뜩 긴장을 하고 지켜보았다.
“이럴 수가!”
대청 위에 펼쳐진 것은 쓰레기더미와 다를 바 없었다. 옛날 당나무에 둘렀던 낡은 금줄이었다. 당집에 있어야 할 것이 어찌 여기에 있을까. 이 지역이 사십여 년 전 낙동강 댐으로 수몰되면서 당집이 물에 잠겼었는데 그때 혹시…?
굵게 꼰 새끼 금줄에는 무엇인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새색시의 저고리도 보였다. 초록색 바탕에 자주색 반회장 비단 저고리였다. 득남을 기원하는 글도 있었다. 군에 간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장문도 있었다. 가가호호 소원을 비는 창호지에 쓴 붓글씨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정월대보름이면 금줄을 몇 아름드리나 되는 우람한 당나무에 둘러 쳐놓고, 당집에다 술과 과일로 제물을 차려서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마을의 안녕과 무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산신, 농신, 조상신에게 농사의 풍년과 모든 액 방지와 마을을 잘 지켜달라고 비는 제천 의식이었다. 꽹과리와 북, 징을 치고 집집이 돌며 지신밟기도 하면서 마을의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행사였다.
교수는 금줄을 정성스럽게 다루었다. 구겨지고 쭈그러진 것을 손으로 쓰다듬듯 펴가며 사진 찍고 기록하고 몇 시간을 만지작거렸다. 마을마다 다 뒤져도 없었는데 유일하게 이 댁에만 있는 진귀한 자료라고 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빈집에 들러 여기저기 돌아보며 조사해가곤 했다. 얼마간 세월이 지나서 전화가 왔다.
“안동대 민속학과 권ㅇㅇ 학생입니다. 이번에 제 박사 논문이 통과됐습니다. 제 후배 한 사람도 논문이 거의 완성 돼가고 있습니다. 덕분입니다. 기쁜 소식 전하고자 전화 드렸습니다.”
몹시 활기찬 목소리였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 그렇게 귀하게 쓰였다니 감사한 일 아닌가.
학생들이 주인 없는 빈집에 들락거리는 것이 불편했는지 어느 날 연락이 왔다. 그 금줄을 민속박물관에 보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었다. 쾌히 승낙했다. 민속학 자료가 되어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 아니겠는가.
내 손길이 닿을 수 있는 시렁이나 선반 위에 얹혀 있었더라면 여태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쓸모없고 수선스럽다고 진작 불태워 버렸을 것이다. 오랜 세월 높은 곳에 꼭꼭 숨어 있다가 젊은이들의 인생길을 밝히는데 공헌하다니, 새삼 놀라웠다. 박물관에 찾아가 문안인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종순 님은 수필가. 《좋은수필》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