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2월호, 신작수필20인선 I 날개와 갱죽 - 오세윤
"잘 입고 남은 음식을 챙기면 주위 사람이 알뜰하다고 말하지만 못 입고 챙기면 거지근성이 있다고 흉본다며 식사자리엔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고 간다고 빙그레 웃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가 부인을 거들어 주섬주섬 남은 음식을 거둔다."
날개와 갱죽 / 오세윤
전철역 앞 중국집 음식점, 아파트 가는 길목에 있는 이 집은 항상 만원이다. 대로변 지층인 데다 홀이 넓고 음식 맛이 좋아 점심때면 사람들이 줄을 선다. 기다리지 않고 먹으려면 정오 2,30분 전에는 가야 자리를 잡을 정도로 항상 붐빈다.
가족단위 손님들이 대부분인 데다 주방도 정갈하고 홀의 종업원들도 모두 끼끗한 청년들이어서 분위기가 온순하다. 상호도 무슨 반점이니 루니 하는 것과는 다르게 한자 뜻을 영어로 번안해 느낌이 특이하다. 나는 시내에 사는 친구가 오던가 자장면이 먹고 싶을때면 주로 이 집을 이용한다.
오늘은 모처럼 호주에 살다 잠시 귀국한 친구부부를 대접하느라 이웃에 사는 같은 중학 동기 B네를 나오라고 해 세 부부가 이 집을 찾았다. 예약된 좌석으로 안내받아 가는 중에도 손님들이 뒤를 이어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저간의 안부를 답하고 난 호주친구가 벽에 가득히 써붙인 영어로 된 메뉴를 보더니 여긴 외국 사람들이 많이 오냐고 물었다. 그때야 나는 이 식당에 드나드는 동안 단 한 번도 외국인을 보지 못한 걸 깨달았다. 고개를 가로저어 아닌 것 같다고 답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중에 식당 입구에서 작게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홀에 들어선 한 늙수그레한 남자를 종업원이 쫓아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나가기를 거부하고 뚜벅뚜벅 걸어내 건너 테이블에 앉아 당당하게 잡채밥을 주문했다. 표정이 만만치 않았다. 이틀쯤 면도를 하지 않은 듯 수염이 더부룩하긴 해도 경우 모를 얼굴이 아니었다. 다만 입은 옷이 조금 허술해 구걸이라도 하러 온 사람으로 오해된 듯싶었다.
나는 노인이 눈치채지 않게 곁눈으로 그의 차림을 살폈다. 남색의 오리털파카에 두툼한 방한용 검정바지, 흰색 운동화. 입성이 후지긴 해도 더럽지는 않았다. 어디 한군데 해지거나 때 묻은 곳은 없었다. 유행이 지난 옷이 부티 나게 차려입은 다른 손님들과 달라 서먹할 뿐이었다. 다른 동네의 다른 중국집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보일 평범한 차림이었다.
사람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에도 노인은 표정을 흐트러뜨리거나 자세를 허물지 않았다. 이어폰을 꽂고 앉아 음식이 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늦게 들어와 빈자리를 찾으면서도 사람들은 노인의 테이블엔 앉지 않았다. 홀 안을 둘러보며 B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옷이 날개라곤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 옷사치가 너무 지나쳐. 옷이 사치하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집이 너무 크면 신이 시기한다는데…. 어떻게 검소하게 입었다고 사람을 그토록 차별한단 말인가.” 은퇴자들의 도시. 일선에서 물러나 공기 좋고 한적한 곳이라고 찾아들어 살며 여행과 취미생활을 즐기는 노인들이 사는 동네. 점심시간이면 저들 남돈시들이 식당의 자리를 다 차지하고 앉아 밥 먹기도 힘들다는, 무임승차가 너무 많아 전철이 적자난다는 불만 대상 1호. 전철을 타고 오갈 때마다 나는 잘 차려입은 저 부유한 노인들에게 경로우대가 합당하냐고 눈을 빠는 젊은 세대를 심심치 않게 본다. 식사를 하면서 B가 그런 세태를 화제 삼으며 억울하다는듯 말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우리 노인 세대에 불만이 많아. 우리 땜에 전철이 적자가 난다고 하질 않나 자기들만 다 차지하고 세상을 즐긴다나 뭐다하면서….우리가 고생한 건 생각지도 않아. 아 글쎄 우리처럼 공헌도 높은 세대가 어디 있나 돌아보시게. 6·25 전란으로 깡그리 부서진 나라를 이만큼 살게 한 공로는 왜 모른 척하는지 모르겠어. 물론 애국했다는 얘기가 아냐. 다 자기 살자고 발버둥친 것이긴 하지만 그게 기틀이 되어 이만큼 잘사는 나라가 된 게 아닌가. 월남전에 참전해 목숨 내놓고 정글을 누비고, 중동사막에 가서 기름밥 4,5년씩 먹으며 집 장만하고, 샘플 든 가방 하나 덜렁 들고 말도 안 통하는 유럽에 가 세일즈를 하며 수출금자탑을 세운 게 누군데. 그 무서운 사교육비에 등골 휜 부모 세대를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아 서글퍼. 노후에 좀 잘 입고 맛있는 것 먹는다고, 공짜로 전철 좀 탄다고 비난할 일이 아니지.” B도 호주친구도 모두 월남전 참전용사. 중장비를 취급했던 B는 젊을 때 6년이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했다.
식사가 끝나자 B의 부인이 종업원에게 비닐봉지를 달래 팔보채니 야채 따위 남은 음식을 담는다. 그런 부인을 뜨악하게 바라보는 호주친구에게 B가 웃으며 해명한다. 모임이든 어디든 식사가 끝나면 꼭 저렇게 남은 음식을 거둔다고, 그걸로 갱죽을 끓여 끼니를 한다며 부인을 두둔한다.
열심히 일해 남부럽지 않게 재산을 모은 B. 살만큼 되었는데 왜 그리 궁상을 떠느냐 지청구해도 막무가내라고 한다. 체면 구긴다고 나무라면 체면이 밥 먹여 주냐며, 배를 곯으며 산 지가 얼마나 된다고 그런 소릴 하냐며, 음식을 남기고 가면 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데 그걸 두고 가면 꼭 하느님한테 벌 받을 것 같아 켕긴다며 기어이 다 챙긴다고 한다. 그 대신 늙은이가 이런 일을 하려면 반듯하게 차려입어야 오해받지 않는다며, 잘 입고 남은 음식을 챙기면 주위 사람이 알뜰하다고 말하지만 못 입고 챙기면 거지근성이 있다고 흉본다며 식사자리엔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고 간다고 빙그레 웃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가 부인을 거들어 주섬주섬 남은 음식을 거둔다.
* 남돈시 : 남는 게 돈과 시간 뿐이라는 일부 극소수 유한계층.
오세윤 님은 《시와 산문》, 《에세이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이웃들』, 『아버지의 팡세』, 『등받이』, 선집 『편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