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2월호, 신작수필20인선 I 그럼에도 고go고go - 염귀순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이라고 읊은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구절을 위안으로 삼고픈 심정이다. 사실은 그만한 열정이나 그렇게 살아볼 용기도 어디에선지 잃어버린 내가, 이러다 진짜 넋을 놓고 블랙홀로 곤두박질칠지 모르는데……."
그럼에도 고go고go / 염귀순
사람에게만 고유한 것에 정신이 있다. 이를테면 인간을 인간답게하며 부실한 나를 육십여 년이나 온전히 지켜준 그것. 맑고 투명한 정신인들 요동치는 세상에서 안녕할 수만은 없으리라. 숱하게 날뛰고 졸아들고 난분분하는 세월 속을 허박한 몸과 사생동고하느라 정신도 진이 빠지지 않았을까.
2주 전 토요일이었다.
저녁미사 시간까지 30분가량 남은 시점에 동네 옷 수선 집부터 들렀다. 옷을 찾기로 약속한 시간을 훌쩍 넘겨 재촉한 걸음이다. 한데 재봉틀 앞에 머리를 박고 있던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며 묻는다. “옷 맡겼어요?”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일꼬. 오전에 가게 문 열자마자 와서 맡겼다. 내일은 휴일이라 오늘 꼭 완성해주십사는 내 청에 저녁 6시로 약속했었다. 그걸 그새 까맣게 잊었단 말인가. 옷 색깔과 모양과 수선 의뢰한 부분을 읊어대는 나의 ‘어시스트’로 이내 기억을 되살린 아주머니는 한참을 뒤져서야, 수선된 원피스를 찾아냈다. 허허, 예사롭지 않은 건망증이라니. 아무래도 정신이 평온하게 거할 집으로서의 그녀 몸은 ‘현재 지나치게 바쁨’이 틀림없다.
미사 시작 15분 전이다. 내 마음도 급해졌다.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5분의 여유가 있었다. 단 5분이라는 순간이 그토록 고맙고 넉넉할 줄이야. 옷 수선 집에서의 작은 소동에 얼굴이며 몸이 끈적댔다. 찌는 날씨 탓에 집에서 찬물이라도 덮어쓰고 싶었었다. 그런 상태에서 간신히 저녁미사로 발길을 이끈 내 마음이 가상할 정도다. 조용조용 문을 열었는데, 어찌된 일? 몇몇 학생이 성가 연습을 하고 있을 뿐 자리가 텅텅 비었다. 아직 미사 준비를… 그러니까… 아차! 미사는 7시가 아니라 7시30분이었지…. 덕분에 청아하게 울리는 성가 소리로 온몸의 열기를 식히며 30분의 기도시간을 얻었다. 그러면서 떨쳐지지 않는 허허로움도 함께했다. 하아. 하느님은 공평하시다.
지난 주 무슨 요일이었던가.
외출에서 돌아와 아파트 공동 현관 문을 열려는데 비밀번호가 아리송했다. 숫자판을 들여다봐도 생각이 날 듯 말 듯. 이 숫자 저 숫자, 이리 누르고 저리 누르고. 진땀을 흘려대도 문은 열리지 않고 틀렸다는 신호만 삑삑 된소리를 질렀다. 오류가 잦을수록 기억은 산산조각나면서 늪으로 가라앉는다. 하는 수 없이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고하고 읍소한 끝에 숫자를 살려냈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20층 버튼을 눌러놓고서야 문득 생각이 났다. 하, 비밀번호를 스마트폰 메모장에 저장해두고 있다는 사실말이다. 나 왜 이러지, 더위 먹었나, 이럴 수가. 엘리베이터 거울 안으로 들어간 얼굴과 마주보며 어이없어 웃었다.
이번 월요일의 일이다.
합창 수업에 가기 위해 일찍 서둘렀다. 전철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동안 읽을 책과 악보들을 가방에 챙겨 담으면서 기분은 상승곡선을 그렸다. 고운 음률 위에 마음의 나래를 한껏 펼친 다음엔 점심약속도 해두었다. 산뜻한 스케줄에 발걸음이 가벼운 스텝을 밟는다. 흥얼흥얼 허밍을 머금고 연습실에 당도했다. 어라, 문이 잠긴 채다. 공연 관계로 연습실을 변경하는 일이 종종 있긴 하지만 이번엔 기별도 없었던 터, 사무실로 직행했다.
“합창은 수요일인데예.”
여직원의 난처하고 조심스런 목소리가 왠지 아득히 들려왔다. 그래, 이건 내 정신이 아니야. 분명 아니야. 어디에 빠졌거나 무엇에 홀린 게야. 몹쓸 무언가의 농간이야. 내 정신이라면 행여 장난으로라도 나를 이리 방치해선 안 되잖아.
사무실 문을 밀고 나오며 뒤늦게 내가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날씨마저 햇볕이 내리쬐다가, 시꺼먼 구름이 덮이다가, 빗방울이 오락가락,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린다. 아, 하느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낫겠나이까?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가 ‘정상’의 사전적 의미다. 그렇다면 내 정신은 그 ‘영역과 경계를 무람없이 넘나듦’이라고 자가진단을 내릴만하다. 경계와 영역은 무슨 인과응보의 이치에 따라 놓이게 되는 처지가 아니더라도, 어떤 기준에 의해 구분되어 존재한다. 경우에 따라선 약간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일 테다. 그렇다한들 자신도 모르게 휘청휘청 영역을 넘나든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깊은 혼란에 사로잡혀 예기치도 못한 고난이 뒤따른다.
요즘 내게서 자주 깜빡거리는 시그널은 분명 정신의 위험을 알리는 적신호다. 의식이 한 꺼풀쯤 동결된 망각의 죄. 좀 거창하게 비약하면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에다 남북이 극단의 대치체제인데, 한편에선 핵무기를 만드는 일촉즉발의 현실인데, 다른 쪽에선 무서워하지 않으며 용감하게 웃고 떠들고 마시고 노래하고 드잡이를 하는 국민의 한 사람이요 평화를 지극히 사랑하는 선민 중 한 사람이기에.
집 근처 보건소를 처음으로 찾았다. 시험 삼아 치매검사를 받아보기로 한 것이다. 너무 기초적인 검사여서 실망스럽긴 했으나 결과는 매우 ‘양호’하단다. 하지만 방금 혈압 약을 먹었나, 안 먹었나, 남은 약을 세어보는 미심쩍은 기억력. 한두 번이 아닌 되풀이. 세월따라 기세왕성해질 대책 없는 건망증을 날더러 어찌하라고. 그럼에도 나의 행보는 태연히 고go고go.
암담한가. 아무튼 이상증세건 위기상황이건 지레 비관하며 절망할 순 없다. 그보다는 웃는 게 백번 낫다고 다짐을 한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이라고 읊은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구절을 위안으로 삼고픈 심정이다. 사실은 그만한 열정이나 그렇게 살아볼 용기도 어디에선지 잃어버린 내가, 이러다 진짜 넋을 놓고 블랙홀로 곤두박질칠지 모르는데…….
염귀순 님은 2003년 《문학예술》 등단. 수필집 : 『펜을 문 소리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