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0월호, 통권204호 I 사색의 창] 공자와 신유상新儒商 - 김미원
“밤에 인력거를 타고 취푸 시내를 달리는데 풍성한 버드나무 가지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휘휘 늘어져 있고 섭씨 20도 정도의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순간 아버지의 노래가 들리는 듯했다. “청천 하늘에는 잔별도 많고 이 내 가슴 속엔 수심도 많지.”"
공자와 신유상新儒商 - 김미원
평생 선비처럼 올곧게 사신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이 년 전 어머니와 함께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曲阜]를 찾으셨다. 세상 떠나시는 날까지 상투를 풀지 않으셨던 할아버지의 아들로, 십삼대 종손으로 의무를 다하셨던 아버지에게 공자의 고향은 특별한 곳이었을 게다.
나 역시 인생은 나이를 먹으며 성숙한다는 공자의 말을 믿었던 터라 취푸를 찾아갈 때 호기심에 부풀어 있었다. 우리가 묵은 호텔 입구에는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논어≫에 나오는 문구를 새긴 목각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천오백여 년 전 공자 때문에 먹고 사는 지역답게 시내 곳곳에서 ≪논어≫ 구절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중국인들은 공자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주민들의 행색은 초라하고 얼굴은 검게 그을었지만 공자에 대한 자부심이 온몸에서 배어 나왔다. 앞 얼굴과 달리 뒷골목 시장은 생선과 닭 등을 그냥 실온에 내놓고 팔아 악취가 나고 곳곳에 쓰레기가 넘쳐났고 심지어 성인용품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공자 사당인 공먀오[孔廟], 공자의 후손들이 살던 공푸[孔府], 공자와 그 제자와 후손들의 무덤이 있는 공린[孔林]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가나 수령을 짐작할 수 없이 오래된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즐비했다.
지금의 공먀오는 명·청대를 거치면서 완성된 것으로 황궁에 버금가는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황금 지붕을 이고 있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서는 마침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제사를 집행하는 사람들의 숫자와 위엄과 질서가 대단해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느낌조차 들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공자와 같은 이가 없었다(自有生民而來 未有孔子也)는 맹자의 말에서 따온 ‘생민미유生民未有’란 편액이 대성전 입구에 붙어있었다. 글귀의 무게가 너무도 의미심장하여 행색이 초라해 한때 상갓집 개라 불리웠던 공자의 불후가 잠시 부러웠다.
공자 자손 무덤 칠천여 기가 묻혀있는 공림은 둘레가 10km나 된다. 실제 후손들은 중국이 공산화되고 문화대혁명 때 대만으로 피신해 주인 없는 집이 되었다. 공자의 종손은 우리나라 퇴계의 제사에는 참석하지만 공자의 묘를 훼손한 공산주의자들의 나라에는 돌아갈 수는 없다고 하여 고향에는 오지 않는다고 한다.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뚱은 공자를 봉건사상의 근원으로서 ‘인민의 적’으로 몰아붙였다. 당시 취푸에서 열린 공자를 규탄하는 대회에 십만여 명이 참여했고 베이징사범대의 홍위병들이 몰려와 석비와 고분, 고서적 등의 유물을 파괴하고 심지어 공자의 무덤까지 파헤쳤다. 그 후 공자는 중국에서 기피 인물이 되었고 유교는 잊혀 갔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뒤에 유교사원이 다시 문을 열었지만, 시장경제 도입으로 말미암아 유교사상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그랬던 공자가 지금 중국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공자 제사는 국영 CC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생중계되기까지 한다.
무려 백 년 가량이나 소외당했던 유교사상은 시진핑이 집권하고 나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시진핑은 공자 사원을 방문하고 생일 축하 행사에 참석하는 등 중국사회가 공자를 존경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나라라는 것을 대내외에 분명히 알리고 있다. 시진핑의 과도한 공자 살리기는 영구집권을 위한 전략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공자가 이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취푸 시내에는 신유상新儒商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휘날리고 있었다. 신유상이라니, 유교를 상업용도로 끌어들인 중국인의 속내가 기발하다. 유교와 상업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어쨌든 취푸 시내와 공자 관련 유적지에는 많은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일행을 안내해준 이십대 후반의 스포츠머리를 한 버스기사는 승용차도 있다고 자랑하며 십 년 안에 버스 백 대를 이루겠다고 말했다. 어쩜 이런 게 신유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중국은 어디를 가나 이렇게 활기가 넘쳐흐른다.
나는 중국 사람들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본다. 하나는 부에 대해 집착하는 모습이다. 부를 상징한다는 금색과 빨강색을, 편다는 뜻의 발發과 발음이 비슷하다 하여 숫자 팔八을 비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애교라 봐주기에는 지나치다. 베이징 올림픽은 팔월 팔일 저녁 여덟 시에 개막식이 열렸다. 모든 것이 돈과 연결되어 있다.
또 하나는 정신적인 것이다. 유교의 나라답게 예의와 염치, 의리와 관계를 중시한다. 접시를 다 비우면 대접이 모자란다고 느낄 정도로 음식도 푸짐하게 준비한다. 모든 것이 꽌시[關契]에서 시작해 꽌시에서 끝날 정도로 한번 맺은 관계를 지속시키려 노력한다. 그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때 같은 동양인으로서 친근하게 느낀다.
중국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조화를 잘 이루어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 지나치게 실용적으로 흘러 자국의 이익으로 세계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을 하지 않고 예의염치를 아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또 개인에게도 해당되는 것일 터이다.
밤에 인력거를 타고 취푸 시내를 달리는데 풍성한 버드나무 가지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휘휘 늘어져 있고 섭씨 20도 정도의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순간 아버지의 노래가 들리는 듯했다.
“청천 하늘에는 잔별도 많고 이 내 가슴 속엔 수심도 많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