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0월호, 통권204호 I 사색의 창] 달항아리 - 김덕조

신아미디어 2018. 11. 28. 08:20

몇 번의 이사에도 온전하게 본 모습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아끼는 물건이라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정말 소중한 보물처럼 포장할 때부터 귀하게 모신다. 내가 대접 받는 듯 흐뭇하다. 그믐에도 환한 빛을 뿜어내는 달항아리의 순한 눈, 그 눈을 닮아 보려고 날마다 눈 맞춤을 하고 있다."







   달항아리    -    김덕조


   흰색과 붉은색의 장미꽃이 탐스럽게 꽂혀있는 백자항아리, 비누공예로 만든 꽃이라는데 가까이 가면 달콤한 향기가 난다. 할머니의 등단을 축하한다며 손녀가 안고 온 꽃이다. 송이마다 손녀의 모습이 들어있는 것 같아 귀엽다. 마주보고 활짝 웃는 모습, 옆으로 앵돌아진 모습,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항아리의 입이 크다. 꽃이 많아야 풍성하고 어울릴 것 같았다. 아직 추운 겨울에도 미리 봄을 알리는 개나리를 담뿍 꽂았고, 가을이 오기 전에 붉은 수숫대와 보라색 구절초를 꽂아 계절을 앞당겨 연출하기에 좋았다. 조화는 항상 같은 모양으로 빛을 내면서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했는데, 생화는 며칠만 지나면 생기를 잃고 시들해져 쓰레기통에 버릴 때는 마음이 쓰인다. 어떤 이는 지는 모습이 보기 싫어 미리 꺾어 꽃을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고 한다. 꽃을 물구나무 세우다니. 꽃은 아름다운 죄로 거꾸로 매달려 미이라가 되고 마는 것이리라.
   한창 인기가 많던 배우가 갑자기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해서 안타깝기도 했다. 그럴 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만인의 연인 오드리 햅번이다. 아름다움의 대명사 오드리 햅번이 잔주름 가득한 얼굴로 난민들을 구제하는 봉사활동을 하는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예가 아니고 무엇일까.
   우리 집 양란이 노란 봉오리를 키우고 있다. 꽃은 봉오리가 막 열릴 즈음이 제일 기대되고 흥분된다. 하늘에 달도 환한 보름달보다 아직 덜 채워진 열나흘 달이 더 좋은 이유다. 완벽하게 둥근 보름달은 하늘의 신도 손 댈 곳 없어 심심할 것이다.
   생화는 좋아하지만 며칠을 못 버티고 힘을 잃고 만다. 시들한 것부터 뽑아내니 솎아낸 상추밭처럼 허전하고 건조하다. 부지런히 꽃을 바꾸다 보면 생화는 돈이 많이 들어가지만 조화는 경제적이기도 하다. 조화는 빈자리를 메우는 가구의 일부분처럼 꽃모양을 하고도 무덤덤하다.
   내가 처음 백자 항아리를 들여놨을 때,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애들이 아직 어린데 맘 놓고 놀지도 못하게 할 거냐고 핀잔을 했었다. 하지만 이미 달항아리는 반짝하고 눈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때, 귀중품을 구한 적이 있다. 토요일 오후였다. 다음날은 집안 결혼식에 가야 하기 때문에 집을 비워야 했다. 묵묵히 지켜보는 달항아리에 신문지로 둘러싸서 맡기기로 했다. 다음날 예식장에 참석한 우리 부부는 달항아리가 걱정이 되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항아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배를 쑥 내밀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 이상 없다는 확인을 하고는 배를 슬쩍 쓸어본다. 깜짝 금고로 변신도 하면서 다 잠든 밤에는 은은한 달빛으로 구석구석 살피며 돌보는 둥근 항아리, 믿음직하고 오래 곁에 있는 친구 같다.
   도자기 가게가 시장 입구에 있는 줄은 알았지만, 도자기는 비싸다는 고정관념도 있었고, 아이들 핑계를 대며 무심히 지나쳤다. 어느 날 문 앞에 반값세일이란 글씨가 붙었다. 이때다 싶어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밖에서보다는 안이 한참 넓었다. 골고루 둘러보아도 이거다 하고 집히는 것은 없었다. 흙으로 빚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맑고 고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 했는데 도자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내가 부끄러웠다. 막연히 모양에만 눈길을 주는 내 곁으로 주인이 다가왔다. 상감청자를 본떴다는 호리병처럼 생긴 꽃병을 들어 보이며 “이거 어떻습니까?” 하고 내 눈치를 본다. 술병처럼 생겼는데 손잡이는 없다 청색 바탕에 잘못 구워서 금이 간 듯 희끗한 줄 모양이 보이고, 허리가 잘록하고 입술이 얇은 것이 잘 다듬어진 미인 같고 깍쟁이 같기도 하다. 내 눈은 한쪽 구석에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둥글게 배를 내밀고 있는 하얀 항아리를 가리켰다. 자잘한 다른 도자기들을 들어내고 내 앞으로 내놓으며 “좋은 작품입니다.” 한다. 좋은 작품이란 어떤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도예가가 아니고 도자기를 파는 사람이란 생각에 묻지 않았다. 바탕에 목단 꽃이 입체감을 더하고 돌려보니 낙관도 있다. 좋은 작품이란 말을 기억하며 백자항아리는 나와 인연이 되었다.
   도예과를 나온 지인이 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다 싶게 손아귀에 쏙 들어가는 도자기를 빚어 그녀 남편의 시집 표지 한쪽을 장식했다. 도자기 인형은 서로 마주보며 행복이라 말하는 듯해서 귀엽기도 하다. 어떤 이가 말했다. 천국에는 예술이 없을 것이라고. 그곳은 고통과 번민이 없기 때문이란다. 하늘의 달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미인의 눈썹을 빚어 놓고 기운 곳을 날마다 조금씩 채워가며 다듬은 것이 보름달일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을 그 모습을 상상한다. 애쓴 보람과 노력으로 태어난 그 달항아리가 내게 왔다는 것은 도예가와 내가 어떤 인연 줄이 닿았는지 모를 일이다.
   허린지 엉덩인지 구분 없이 둥그스름한 배는 아이를 여덟이나 낳았다는 어머님의 모습이다. 여덟 자식을 품었던 배니 절대로 푹 꺼지는 일은 없다고 한다. 당신은 자기 배를 헌 섬 같다 하셨지만, 둥글고 원만한 모습에 자식들은 등 기대고 모여 앉을 수 있어 좋았다. 배부른 항아리에 선뜻 눈이 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몇 번의 이사에도 온전하게 본 모습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아끼는 물건이라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정말 소중한 보물처럼 포장할 때부터 귀하게 모신다. 내가 대접 받는 듯 흐뭇하다.
   그믐에도 환한 빛을 뿜어내는 달항아리의 순한 눈, 그 눈을 닮아 보려고 날마다 눈 맞춤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