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월간『수필과비평』[2018년 09월호, 통권203호 I 사색의 창] 사랑나무 - 최운숙

신아미디어 2018. 11. 23. 14:40

사랑나무의 굽은 손등에 올라섰다. 수많은 사랑을 지켜봐 주고 보듬어 주었을 나무. 첫걸음 떼는 아이처럼 섬마섬마하며 그 나무 아래서 두 손 모아 비손한다. 조건에 연연치 않으며 가끔 흔들리더라도 억지로 서려 말고 곱게 물드는 사랑나무처럼 소소한 정담으로 덧칠을 하며 우리 부부 고운색으로 물들어가길 바랄뿐이다."







   사랑나무    -    최운숙


   이방주 수필가의 북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다. 상재할 수필집은 《가림성 사랑나무》이다. 무거운 느낌의 ‘가림성’보다 왠지 가을이 가기 전에 진한 사랑놀이를 하고 싶어 ‘사랑나무’에 관심이 갔고 그 이야기를 필자에게 듣고나니 급한 마음은 벌써 그곳을 향하고 있다.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가림성으로 정하고 1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가을 하늘은 창창하고 곱게 물든 산들은 붉디붉었다. 순간, 나도 붉은 단풍잎으로 물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은 이렇게 숙맥인 나도 절로 춤추게 만든다. 계단을 오르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자 돌로 정교하게 쌓은 가림성이 있었지만, 내 눈에는 ‘사랑나무’가 들어왔다. 처음으로 그이를 만난 듯 가슴이 떨린다. 돌아보니 나의 긴 기다림의 만남은 늘 이랬다.
   400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의 수형이 숨을 멈추게 했다. 두 팔로 껴안아 보지만 어림없다. 굳게 닫힌 성문처럼 다가서기도 쉽지 않다. 수백 년 동안 눈비와 강풍을 견디며 다져진 단호함이 깐깐한 가림성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수령이 긴 느티나무는 대부분 당산나무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며, 일부 느티나무는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피 같은 수액을 흘린다는 영험한 나무이다. 아버지가 위로만 쑥쑥 자라는 전나무라면 어머니는 따뜻하게 가족을 품어 안는 느티나무 같다.
   사랑나무는 어떤가. 백제의 융성과 멸망을 함께했으며 민초들의 설움과 애환을 지켜보았고 멀리 보이는 강경읍과 금강 하류, 군산까지도 굽어보았던 나무이다. 드리워진 산 능선이 사랑나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오랜 세월을 견딘 회백색 수피는 살아온 흔적을 결로 새기고 있었다. 울퉁불퉁하게 드러난 뿌리만큼 옹이 또한 많다.
   한쪽으로 세를 불린 가지와 몸체가 어우러져 하트 모양을 하고 있어 사랑나무라고 불리기 시작했단다. 그로 인해 <서동요>를 시작으로 <대왕 세종>, <엽기적인 그녀> 등 드라마와 영화촬영지로 잘 알려진 나무이다 .
   일출과 일몰이 아름다운 명소인 사랑나무가 있는 가림성은 사진작가들의 사랑을 받으며 즐겨 찾는 곳이다. 이른 아침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과연 어떨까. 혹시 이루지 못한 연인들의 사랑의 꿈을 나무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모습은 아닐까. 해가 설핏하면 환영처럼 아름다운 노을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사진작가들이 찾는다. 수십 번 변화되는 앵글과 수백 번의 눈빛이 교차해 멋진 작품이 담길 즈음이면 사랑나무는 비로소 하루의 고단함을 내려놓는다.
   ‘사랑나무’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내로라하는 드라마, 영화 시나리오작가와 사진작가의 사랑을 받고, 수많은 연인이 사랑나무 밑에서 언약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니 얼마나 많이 찾겠는가. 혹여 맹세한 많은 약속 중 비밀을 끝까지 간직해야 할 사랑은 어떤 색으로 물들었나. 평생 약을 써도 낫지 않는 불치의 사랑은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모든 비밀을 사랑나무는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람의 마음속엔 섬이 하나씩 있다. 그 작은 섬은 때때로 등불이 되기도 하고 문득문득 그리움이 되기도 하는 작은 섬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아름답게 하는지 오십이 넘은 지금에야 느낀다.
   사랑나무를 돌면서 내가 그토록 따랐던 남편을 그려본다. 그이의 몸인 듯 사랑나무를 안아본다. 탄탄했던 가슴팍은 예전의 그 가슴이 아니었다. 내가 나이가 들듯 그도 비껴가질 못했다. 손으로 체온이 전해온다. 안쓰럽지만 따뜻하다. 잊고 지냈던 이십여 년의 세월 뒤에 그 사람이 새롭게 다가온다. 잊혔던 사랑에 다시 불이 붙을 것만 같다. 사랑나무 덕분인지 마음속의 섬이 아주 가까이 와 있음을 느낀다. 두근대던 첫 만남의 기억이 오늘 밤을 설치게 할지도 모르겠다.
   사랑나무의 굽은 손등에 올라섰다. 수많은 사랑을 지켜봐 주고 보듬어 주었을 나무. 첫걸음 떼는 아이처럼 섬마섬마하며 그 나무 아래서 두 손 모아 비손한다. 조건에 연연치 않으며 가끔 흔들리더라도 억지로 서려 말고 곱게 물드는 사랑나무처럼 소소한 정담으로 덧칠을 하며 우리 부부 고운색으로 물들어가길 바랄뿐이다.